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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에서 라 망가로 가는 차 안에서 남편이 내게 말한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무슨 말요?”“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던지...”“헐~~”

남편은 며칠 전에 론다에서 있었던 일을 거론하는거다. 본인은 뒤끝이 없다고 하지만, 남편은 뒤끝 작렬이다. 다투다보면 몇 년 전에 있었던 일도 끄집어내곤 한다. 마르베야에 머물 때, 1시간 거리에 있는 론다의 누에보 다리를 보러 갔다. 그때 내가 차를 몰았는데, 갈림길에서 방향이 헷갈려 남편에게 어느 길이냐고 물었다. 남편은 오른쪽이라고 했다가 다시 왼쪽이라고 했다. 핸들을 잡고 휘청거리던 나는 뒤따르던 차량이 있어 갈림길 중간에 차를 세웠다.

남편에게 “제대로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니 “운전하는 사람이 표지판을 잘 보고, 네이게이션도 잘 확인해야지”라고 더 발끈한다. 남편은 유럽에 자주 왔고 운전도 많이 해봐서 능숙할지 몰라도, 경험이 부족한 나는 서툴 수밖에 없다. 야속한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 될 걸 왜 화를 내냐?”고 했다. 그러자 “사람이 길을 잘못 알려줄 수도 있지,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되받아친다. 그러면서 “길 중간에 세운 차나 빨리 빼라”고 언성을 높인다.

같이 있으면 싸움이 될 것 같아 나는 길가에 차를 대고 내렸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공터가 나와 그곳에 앉아 분을 삭였다. 조금 있으니 남편이 딸아이를 앞세워 나를 찾으러 왔다. 나는 남편에게 “이제 운전하기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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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다로 가는 내내 우리 사이는 싸늘했고, 도착해서는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일까지 생겼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투우장을 보고 누에보 다리를 보러 가는 중간에, 남편과 딸아이가 사라진거다. 나는 가족과 헤어진 그 지점에서 멈춰 기다렸다. 화장실을 가고 싶었지만 혹시 어긋날까봐 자리를 뜨지 않고 참았다. 그런데 남편에게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읽지 않는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그제서야 남편과 딸아이가 돌아오는게 보였다. 딸아이가 내게 달려오며 와락 안긴다. 남편은 자기와 떨어져 있고 싶어, 차 한 잔 마시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가슴속을 채우고 있던 걱정과 외로움이 분노로 훅 바뀌었다. “그게 말이 되냐, 버리고 가고 싶었냐”고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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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그럴 리가 있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나중에 딸아이에게 들어보니 남편은 누에보 다리 이쪽저쪽에서 사진을 다 찍은 다음에야 나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남편에게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막 쏟아냈다. 론다에 올 때 갈림길에서 참았던 울분까지 더했다. 이번에는 남편이 나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듣기만 한다. 그런데 내가 “당신은 성질이 냉정하고 잔인하다. 일부러 두고 간 거 아니냐”고 하자 얼굴색이 확 바뀐다.

남편은 “이제부터 각자 알아서 하자”며 휙 가버렸다. 나와 딸아이는 남편과 헤어진 곳에 앉아 있다가 바람이 너무 불어 광장에 있는 맥도널드에 들어갔다. 딸아이가 내 휴대폰으로 아빠에게 “맥도널드에서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카카오톡을 보낸다. 이번에는 금세 답장이 왔다. “아빠가 금방 갈게”

나는 남편이 어디로 간지 알거 같았다. 분명 절벽 아래로 내려가 누에보 다리를 올려다보고 사진을 찍었을거다. 남편은 다정한 편이지만, 때때로 너무 이성적이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냉정하다. 누에보 다리의 진면목을 확인하려면 절벽 아래로 걸어 내려가야 한다. 남편은 론다에 온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혼자라도 갔을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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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숙소로 돌아와 카메라에 보니 밑에서 찍은 다리 사진이 수두룩했다.그날 론다에서 대판 다툰 뒤에 남편과 나는 한동안 냉각기를 가졌다. 싸움은 사소한 말 하나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가득 찬 컵의 물은 마지막 한 방울로 넘치지만, 그 전까지 쌓이고 쌓여야 한다. 나는 론다에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신경이 예민했고, 남편은 남편대로 지쳐있었다. 서로 힘들다보니 더 서로에게 기댔고 또 그만큼 실망하며 화가 쌓였다.

남편은 그라나다를 떠나 라망가로 향하는 차 안에게 “할 말 없냐?”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나에게 심한 말을 들었다고 생각한 남편은 “자신도 상처받았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나또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론다에서 나는 혼자 오지에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 무척 놀랐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남편이 “다음엔 그런 일이 없을거다”라고 말하며 사과하길 바랐다.

우리의 냉전은 라망가에 도착해서야 끝났다. 중간점검이라는 명목아래 가족회의를 했고, 서로 여행하며 느낀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에 남편이 론다 이야기를 꺼냈고, 우리는 서로 미안함을 표현했다. 희한하게도 “미안하다”는 표현이 입 밖으로 나오자,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듯 마음의 평화가 흘러 들어왔다. 그동안 마음이 너무 아프고, 여행이 힘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돌리고 나니 하늘 색깔부터 달라 보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사과할 걸. “내가 미안해요.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요” 그럼 편해질 것을. 며칠 동안 불편한 마음을 가져온 게 후회된다. 앞으로 여행을 하며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다. 부부관계에서도 여행하기 전 보다 조금 더 현명해지고 싶다.

딸아이에게도 미안하다. 여행을 하며 힘든 점이 많았을 텐데, 엄마 아빠 눈치 보랴 마음을 더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부모가 다투면 아이는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해도 분위기로 그 상황을 민감하게 감지한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부부지간에 분열이 발생하면 가능한 빨리 서로의 입장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 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또한 아이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고 그 상황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줘야 한다. 아이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뒷전으로 미루면 안된다. 아이의 감정을 풀어줘야 한다. 어쩌면 우리 부부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았을 수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도 남편도 많은걸 배운다. ‘여행은 삶의 경험과 지혜가 농축한 교과서’와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주화

※배우 이주화는 지난 1년간 잠시 무대를 떠나 유럽을 비롯해 세계각지를 여행했다. 추억의 잔고를 가득채워 돌아온 뒤 최근 <인생통장 여행으로 채우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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