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봄여름가을겨울, 서울가요대상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한국 대중음악의 자존심’. 이 수식어가 그룹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 전태관)만큼 어울리는 팀이 또 있을까.

봄여름가을겨울은 지난 25일 열린 ‘한국방문의해 기념 제27회 하이원서울가요대상’ 시상식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이 팀이 1980~2000년대 이룬 업적과 성과들을 감안하면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수상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80년대 가요계의 대표적인 ‘아이콘’ 조용필, 김수철, 故(고)김현식, 故유재하와 음악적 인연을 맺고 함께 호흡 했었고, 이후 퓨전재즈, 훵크(Funk) 등 흑인음악을 가요에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음악으로 대중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30년의 경력 동안 그들의 성과물들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유독 많이 따라다닌다. 치열한 음악적 고민과 실험을 게을리한 적이 없다는 방증이다.

지난 1월 중순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전태관은 자리를 함께 하지 못했다. 김종진과 데뷔 30주년을 맞은 봄여름가을겨울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이틀간, 총 4시간에 걸쳐 나눴다. 첫날 만나서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추가 인터뷰는 다음날 전화로 1시간 동안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올해는 봄여름가을겨울 1집(1988년 발매) 발매 30주년이다.

엊그제 같다. 1집에 들어있는 곡들을 연주하던 게 엊그제 같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렀다는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마지막 10년은 없다시피 살았다.

-전태관과는 언제 처음 만났나.

나는 81년, 전태관은 82년으로 기억한다. 아마 전태관의 기억이 정확할 것이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방배동의 자주 가던 카페에서 정원영, 한상원, 김광민, 전필립 등 음악하는 사람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에 파티를 했는데 그 자리에 처음 나온 전태관과 만났다. 그 장소는 악기가 있는 카페가 아니었다. 각자 악기를 들고가 연주를 하며 밤새 놀았다. 당시 드럼을 치던 전필립(현 파라다이스그룹 회장) 형이 미국에 유학을 간다고 해서, 우리가 ‘가면 안 된다. 갈 거면 드러머 한 명을 추천해주고 가라’ 라고 했다. 필립 형이 아는 드러머가 없어서 정원영 형이 전태관을 추천했다. 정원영과 전태관은 대학가요제에서 만나 친해졌다고 했다.

전태관의 첫인상은 ‘샌님’이었다. 지금이랑 똑같았다. 그 모임은 블랙 뮤직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이뤄졌었다. 당시만 해도 흑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찾기 어려웠었다. 대부분 록, 포크 등 백인 음악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난 그 자리에서 허비 행콕의 ‘카멜레온’을 연주했었다. 정원영, 한상원, 김광민이 모임의 주축이었는데 그 당시에도 그들은 천재적인 뮤지션들이었다. 10대 후반부터 음악하는 선배들이 모두 인정하는 뮤지션들이었다.

특별한 모임명은 없었고, 그냥 우리끼리 ‘슈퍼 세션’이라 불렀던 것 같다. 지금의 크루 개념과 비슷했다. 블루스 기타리스트 마이클 블룸필드가 참여한 프로젝트 앨범 ‘슈퍼 세션’을 모두 좋아했었다. 그 구성원들은 그 앨범만 냈었다. 한상원 김광민 정원영 등과 함께 “우리는 ‘슈퍼 세션’”이라고 했던 것 같다.(주: 이들은 90년대 초중반 ‘슈퍼밴드’란 이름의 프로젝트 팀으로 활약한다.)

-모임의 주축인 정원영, 한상원, 김광민 등은 모두 미국 버클리음대로 유학을 갔는데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만 한국에 남았다.

안 간게 아니라 못 간거다. 그 형들은 다 ‘금수저’였다.(웃음) 모두 삼청동, 성북동 등에 살았다. 전태관도 성북동 출신이긴 했는데 나는 해방촌 출신이었다. 유학을 못 간 건 경제적 이유가 컸다.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분들도 돈이 있어서 갔던 건 아니더라. 그분들도 죽음을 무릎쓰고 간 거였다.

-80년대 초반 김종진과 전태관은 어떻게 음악 교류를 이어갔나.

83년 봄 내가 해군 홍보단에서 군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함께 군 복무를 했던 이들이 훗날 ‘빛과 소금’을 결성하는 장기호, 박성식이었다. 거기서 3년 동안 음악을 했다. 그 시기 전태관은 대학교에 다니며 주말에 대방동 해군 본부로 면회를 왔다. 와서 해군 홍보단 연습실에서 악기 세팅을 하고 함께 합주를 했다.

사실 군대에 주말마다 합주를 하러 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텐데 전태관은 워낙 성품이 좋고, 자리에 있는듯 없는 듯 하는 기술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전혀 부담을 갖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무엇보다 연주력이 워낙 출중했다. 듣도 보도 못한 연주를 하니 해군 홍보단원들도 높이 평가했다. 마술이나 묘기를 펼치는 사람 보듯 전태관을 대했다.

전태관이 해군 홍보단에 온 건 나 뿐 아니라 함께 군복무한 장기호, 박성식과도 합주를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부대 내에 드러머가 없었다. 장기호는 나의 음악 인생 초창기에 큰 영향을 준 분이다. 음악적으로 천재였고, 목표도 남달랐다. 우리가 동네 등산가였다면 그 형은 히말라야 등반가처럼 행동하고 생각했다. 나와 전태관에게 큰 영향을 줬다.

군대에 있을 때 전태관과의 사이가 돈독해졌다. 내가 군대에 안가고 밖에 있었다면 우리 둘은 100% 깨졌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고, 일주일에 한번 겨우 만나 음악적 교류를 하고 서로 음악적 미션을 주고 받다 보니 싸울 틈이 없었다. 매일 만나서 그랬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 두분이 특히 친해졌나.

가장 큰 건 ‘음악’이다. 흑인 음악을 좋아하는 동갑내기였는데,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 어려웠다. 우린 외딴 섬에 남은 두명의 조난자들 같았다.

그 시기 우리는 허황된 상상을 많이 했다. 소위 말하는 ‘위시리스트’를 만들었다. 우선 ‘저런 좋은 사운드를 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 퀸시 존스, 스틸리 댄 등의 음악을 들으면 사운드가 엄청나게 좋았다. 당시 국내 음악과 차이가 너무 났다. 그런 소리를 내보고 싶었다.

두번째로 ‘라이브 앨범이란 걸 내보고 싶다’고 꿈꿨다. 그때 가요계에는 라이브 앨범이란 게 없었다. ‘쇼 미 더 웨이’로 유명한 피터 프램튼의 두장짜리 라이브 앨범은 재킷을 펼쳐야 그의 전신 사진을 확인할 수 있게 구성돼 있었는데, “우리도 그런 죽이는 걸 만들어 보자”고 말했었다. 그룹 키스도 좋아했는데 두장짜리 라이브 앨범을 들어보면 연주력과 사운드가 뛰어났다. 그런 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사실 우리 이전에 누군가 해주길 바랐다. 그런데 누가 안한다면 우리가 하자고 다짐했다.

그때는 해외 여행 자율화 이전 시대였는데 ‘미국 본토에 가서 녹음해보고 싶다’고 막연한 꿈도 나눴다. 그리고 외국 앨범을 보면 모두 재킷이 예술품인데 우리도 그렇게 재킷을 예술로 만들자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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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겨울이 처음 참여한 앨범인 故 김현식 3집.(1986년)

-김종진과 전태관은 1986년 김현식의 백밴드로 ‘봄여름가을겨울’이란 이름을 처음 알리게 된다. 당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는 김종진, 전태관, 유재하, 장기호였다.

군대에서 제대 하자마자 김수철 형이 우리를 불렀다. 그래서 86년 무렵 ‘김수철과 작은 거인’(김수철, 전태관, 장기호, 김종진) 4인조로 활동했다. 그 팀으로 앨범은 못 냈지만 방송 무대 데뷔를 하게 됐다.

그러다 장기호 형이 김현식 형에게 우리 이야기를 하게 된다. 김수철 형은 워낙 천재적이고 사람도 좋지만 방송에서는 그 형 한명만 나오길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철 형 혼자 활동하게 될 때가 많았는데, 김현식이 내건 조건은 “너네는 백밴드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하나의 밴드다. 나는 보컬리스트일 뿐, 음악은 너희가 만들게 된다”였다. 그 얘기를 듣고 수철 형께 양해를 구하고 현식 형과 함께 하게 됐다.

현식 형이 “팀이름은 너네가 직접 지으라”고 했다. 잘 기억은 안나는데 다른 멤버들은 엘튼 존이나 빌리 조엘의 노래 제목 등을 제시했다. ‘김현식과 어니스티’ 식이었다. 그때 내가 봄여름가을겨울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처음엔 반응이 별로였다. 김현식 1집 노래 제목이다보니 다른 멤버들이 “현식 형한테 너무 아부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줬다. 그런데 나는 아부가 아니라 그 앨범이 너무 좋았다. 사랑과 평화가 연주하고, 만든 앨범이었는데 여러 장르의 완성도 있는 노래가 담긴 앨범이었다. 멤버들은 싫어했는데 현식 형이 결국 봄여름가을겨울로 팀명을 정했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만 1년도 채 유지되지 못했다. 현식 형이 마약 사범으로 구속됐기 때문에 보컬리스트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박성식, 장기호도 탈퇴했다.(팀 라인업 변경 순서: 故 유재하는 김현식 3집 완성 전 탈퇴→박성식으로 교체 →김현식 3집 발매→김현식 구속→ 장기호 박성식 탈퇴) 보통 다섯 중 세명이 나가면 팀이 깨진 게 맞는데 나와 전태관은 그 이름을 계속 붙잡고 항해를 이어나가게 된다.

봄여름가을겨울이란 팀 이름을 버리기엔 그 팀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했다. 1년 활동하면서 스스로 정체성과 목표점이 생기고, 우리만의 색깔이 생겼다.

-故김현식은 어떤 사람이었나.

우리에겐 음악 스승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똑같다. 늘 우수에 차있었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다. 확실히 천재였다. 나는 30년 넘게 음악을 했고, 현식 형이 죽은 나이를 20여년 전 겪었는데, 최근에서야 현식 형이 말했던 게 이거였구나 깨닫게 되는 것도 있다. 나보다 20~30년 먼저 음악과 세상에 대해 알았던 걸로 판단된다.

현식 형을 무시한 적도 있었다. 그 형은 보컬이고 우린 연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5년 사이 그런 편견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 형이 가르쳐준 발성법이 있는데, 그게 뭘 의미하는지 불과 5년 전에 알게 됐다. 그 형이 말한, 리듬 타는 법이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7~8년전 깨달았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이 만든 김현식 3집 수록곡 ‘쓸쓸한 오후’는 내 작곡 데뷔곡이기도 하다. 그 앨범은 나와 전태관 인생 최고의 앨범이다. 무엇보다 희대의 명연주자들과 모여있었다는 게 정말 큰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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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유재하 앨범.(1987년)

-함께 밴드를 했던 故 유재하는 어떤 사람이었나.

엄청 구수한 친구였다. 인간미 넘치고, 수더분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음악할 때도 부족함 없이 잘 했다. 딱 하나 못 이룬 게 있다. 라이오넬 리치나 빌리 조엘 처럼 피아노 앞에 앉아서 자신이 건반을 누르면 수많은 관객이 환호하는 장면, 그 꿈을 그는 자주 얘기했었다. 그걸 경험해 보지 못하고 떠났다.

재하는 술을 참 많이 마셨다. 방배동에 잘 가는 카페가 있었는데 거기 피아노가 있었다. 위스키 한병을 시켜놓고 취할 때까지 마시고, 피아노를 치면서 라이오넬 리치를 부르는 게 취미였다. 기타도 기가 막히게 잘쳤다. 나보다 잘쳤다. 빌리 코브햄의 곡을 카피하자고 얘기하면 재하는 그날밤 카피해 왔다. 나는 지금도 못 치는 곡이다.

유재하의 베스트 프렌드는 전태관이었다. 당시엔 앨범을 내면 달리 홍보할 방법이 없었다. LP 밖에 없던 시절인데 대학교 앞 카페를 다니면서 한장씩 놓고 가는 게 주요 홍보 방법이었다. 재하가 앨범을 냈을 때 운전면허가 없었는데 태관이가 운전해줬다. 트렁크에 잔뜩 LP를 싣고, 재하는 조수석에 앉고, 태관은 운전을 하며 둘이 서울을 누볐다. 태관도 운전을 잘 못하던 때였는데 렌트카를 빌려 기어를 1단에 놓고 서울 전역을 누볐다.

재하가 태관에게 미안했는지 어느날 운전면허를 따더라. 운전면허를 딴 날 재하가 기념으로 술을 산다고 했다. 방배동의 단골 카페에 모여 밤에 술을 마셨다. 나는 새벽 한시 반쯤 집에 돌아왔는데 아침에 태관에게 전화가 왔다. 재하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밤에 술을 마신 뒤 재하는 자기 친구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올랐는데 그 차가 중앙선을 침범했고, 상대편 차가 조수석을 받았다고 들었다.

-故유재하가 남긴 단 한장의 앨범은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는다. 처음 들었을 때 천재적이라고 느꼈나.

앨범을 처음 들을 때 느낌은 늘 그가 들려주던 음악이란 점이었다. 그 앨범의 비밀은 현악, 오케스트라 사용에 있다. 한양대 음대 출신이라 가능했던 작업인데, 당시엔 아무도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었다.

미국 음악 산업이 성장한 역사를 보면 대형 녹음실마다 있던 레지던스 오케스트라가 큰 힘이 됐었다. 한국에도 대형 스튜디오엔 전속 오케스트라가 있었는데 한국적인 트로트 장르에 쓰였었다. 재하는 그분들을 활용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학교 지인 등을 동원해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이후 1988년 봄여름가을겨울 앨범을 낼 때까지 공백기 동안 무얼 했나.

내 음악적 멘토였던 베이시스트 송홍섭 형이 주선해줘 나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스튜디오 세션으로도 활동했다.

monami153@sportsseoul.com

<봄여름가을겨울이 25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제27회 하이원 서울가요대상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 |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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