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 한국 빙속사(史)는 수많은 선수의 피와 땀이 얼음을 적시는 양과 비례해 조용하지만 꾸준히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쾌거로 나타났다.


그 '피와 땀'의 주인 중 한 명인 제갈성렬(47)을 태릉선수촌 국제스케이트장에서 만났다. 그는 고향 팀인 의정부시청 감독으로서 선수들을 지도하며 여전히 얼음 위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스피드 스케이팅과 만남, 그야말로 '운명적'이었다"


스피드 스케이팅이 '효자 종목'으로 떠오른 역사는 쇼트트랙보다도 짧다. 쇼트트랙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수많은 메달을 쏟아내는 동안 스피드 스케이팅은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전까지 김윤만과 이강석이 각각 은메달(1992년 알베르빌)과 동메달(2006년 토리노)을 하나씩 획득했을 뿐이었다.


제갈성렬이 스피드 스케이팅에 뛰어든 1970년대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이 종목에 운명처럼 빠져들었다.


초등학생 시절 제갈성렬은 받아쓰기를 하면 세 문제 이상을 맞힌 적이 없어 항상 나머지 공부를 하던, 소위 말하는 '공부와 담을 쌓은' 아이였다. 그는 "하루는 다섯 문제 이상을 맞혀 평소보다 일찍 학교를 나섰다.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처음 보는 자세를 따라 하고 있었다"라고 스피드 스케이팅과 처음 만났던 설레는 순간을 설명했다. 이어 "너무 재미있어 보여 나도 옆에서 자세를 따라 했다. 훈련이 끝난 후 선생님에게 나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스피드 스케이팅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스피드 스케이팅이었지만, 그는 4, 5개월 만에 도 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쓰는 등 재능을 보였다. 논두렁을 얼린 야외 빙상장에서 훈련을 하고 여름에는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연습하기도 하는 등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는 학창시절 한 번도 이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의 열정을 막은 것은 주변의 반대였다.


그는 "집에서 반대해 결국 중도에 그만두게 됐다. 의정부중학교에서 계속 스카우트 제의를 했지만, 중학교도 빙상부가 없는 일반 중학교로 들어갔다. 그러나 1학년 때 엄청난 후회가 몰려왔고 밥도 먹지 않고 부모님에게 매달렸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의정부중학교로 전학을 갔고, 1년 후에 국가대표가 됐다"고 회상했다.


첫 올림픽, 알베르빌


그렇게 어린 나이에 당당하게 국가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그는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을 준비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미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5위를 하는 등 초대 출전에서 메달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첫 올림픽을 수개월 앞둔 어느 날 그는 강압적인 지도 방식을 견디지 못하고 선수촌을 잠시 이탈했다가 2년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은퇴 지시나 다름없는 징계였다. 다행히 여러 체육인의 도움으로 3개월로 줄어 올림픽에 나설 수 있었지만,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데다 정신적으로도 타격을 입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제갈성렬은 대회 후 심정을 "가만히 있어도 숨이 막히고 도망가고 싶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심각한 공황장애를 겪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때 힘이 되어준 이는 아버지였다.(그는 지난해 부친상을 치렀다.) 아버지는 "네가 지금까지 이뤘던 것을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침착하게 다시 해보자"며 어깨를 두드렸다.


아버지의 격려에 힘을 얻은 그는 다시 스케이트화 끈을 단단히 묶고 피나는 연습에 매진했다.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동계올림픽 개최주기가 조정되면서 2년 만인 1994년에 릴레함메르에서 메달을 노릴 수 있게 됐다. 2년의 짧은 준비 기간 제갈성렬은 사적인 모임도 자제하며 철저하게 훈련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 세계 대회에서 꾸준히 5위 안에 들 정도로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릴레함메르에서의 성적,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올림픽을 한 달 반가량 앞둔 릴레함메르에서는 테스트 이벤트로 월드컵 2차 대회가 열렸다. 한껏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던 제갈성렬 역시 이 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캐나다의 숀 아일랜드와 한 조를 이뤄 탔다. 스케이트가 너무 잘나갔다. 아웃코너에서 시작했는데도 한참을 앞섰다"라며 잊을 수 없는 당시 기억을 힘겹게 꺼냈다.


그는 "가장 빠른 속도를 내야 하는 구간을 지나고 있었다. 해설을 할 때 '마의 구간'이라고 강조하는 구간이다. 여기서 스케이트 날이 얼음이 파인 곳에 들어가면서 넘어졌다. 넘어지는 과정에서 날이 얼음에 박히면서 발목이 옆으로 틀어졌다"고 담담히 전했다.


이어 "처음엔 창피해서 빨리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발목이 말을 듣지 않아 자세히 보니 말 그대로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한 발로 나머지 150m 구간을 달려 레이스를 끝낸 후 그대로 구급차에 실려 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복숭아뼈가 조각났고 거골도 골절됐다. 한달 반 안에 회복은 커녕 선수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는 심각한 부상이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드려야 하는데 부상을 입었다고 말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어야 했다. 힘들고 죄송해 통화 후 벽을 보고 20분 동안 펑펑 울었다"고 당시 느꼈던 절망감을 고백했다.


귀국한 제갈성렬은 수술 후 6개월은 지켜봐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병상에서도 운동을 하며 몸을 만들었고, 수술 자국이 아물지 않아 진물이 나는데도 스케이트화를 억지로 신고 빙상에 올랐다.


하지만 큰 부상을 당한 제갈성렬을 올림픽에 데려가는 것은 누가 봐도 합리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당시 감독님은 물론 의무팀 신기문 선생님도 '다시 다치면 선수 생활이 끝난다'며 말렸다. 그러나 죽어도 빙상에서 죽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어둠 만이 그를 휘감던 그때 한 줄기 빛이 보였다. 그는 "결단식에 참가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 고(故) 김운용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님이 직접 나를 부르셨다. 임원들 앞에서 꼭 올림픽에 나가야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두렵지만 가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게 올림픽에 나가게 됐다"고 감격스러웠던 순간을 회상했다.


그렇게 대회에 나선 그는 이를 악물고 얼음 위를 갈랐고, 500m에서 40명의 참가자 중 30위를 기록했다. 비록 메달권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지만 "나 자신을 이겨내고 당당히 중위권으로 레이스를 마쳤다는 생각에 정말 행복했다. 나 자신에게 메달을 주고 싶다"라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세 번째 올림픽, 세 번째 불운


시련을 이겨낸 그에게 전성기가 찾아왔다. 1996년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500m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하마르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1,000m 동메달까지 걸었다. 자신도 "1997년 세계 톱3 안에 들 정도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제갈성렬을 괴롭혔다. 장비의 발전이었다. 그는 "네덜란드 선수가 클랩 스케이트를 신고 나와 말도 안되는 성적을 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국의 스포츠 과학이나 정보력이 비교적 뒤처졌기 때문에 클랩 스케이트의 원리나 필요성을 선수들이 체감하지 못했다. 장비를 바꾸는 건 굉장히 모험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한국 선수단은 적응 실패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클랩 스케이트에 미리 적응한 네덜란드는 30개의 메달 중 무려 11개(금5 은4 동2)를 휩쓸었다.


그리고 이 대회는 제갈성렬의 마지막 올림픽이 됐다. 1999년 강원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500m 은메달을 따낸 후 2001년 은퇴했다. 그는 치열한 자기관리로 세계적인 선수로 올라섰지만, 중요한 대회마다 항상 예기치 않은 외적 요인에 발목 잡혀 올림픽 메달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흘린 땀은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 후배들이 더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는 자양분이 됐다.


제갈성렬은 은퇴 후에도 빙상계를 떠나지 않으며 지도자와 국제 심판 등에 도전했다. 본의 아니게 다시 한 번 전 국민에게 이름 네 글자를 알렸던 밴쿠버 동계올림픽 해설위원 역시 그의 여러 도전 중 하나였다.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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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김도형기자 wayne@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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