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스피드 스케이팅은 단숨에 한국의 동계올림픽 주력 종목 중 하나로 떠올랐다.


한국이 스피드스케이팅 강국으로 떠오르기까지 수십 년간 도전과 노력의 역사가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배기태, 김윤만, 그리고 제갈성렬(47)이 있었다.


한국의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부문 최초의 올림픽 메달은 김윤만이 획득한 1992년 알베르빌 올림픽 1,000m 은메달이었다. 이후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이강석이 500m 종목에서 동메달을 획득할 때까지 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 사이를 누비며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제갈성렬이다. 1992년 올림픽 국가대표로 혜성처럼 나타나 국민 앞에 선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도 출전하며 이름을 알렸다.


1996년에는 하얼빈에서 열린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1, 2차 레이스 기록 합계 1분 13초 57로 일본의 하마미치 다카히로와 공동 금메달을 차지했다. 자신의 공식 대회 첫 금메달이자 한국의 동계 아시안게임 500m 부문 첫 금메달이었다.


제갈성렬은 여세를 몰아 같은 해 노르웨이 하마르에서 열린 세계 남녀 종목별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해 1,000m 동메달을 획득했다.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서도 태극마크를 달며 3회 연속 올림픽 무대를 밟은 그는 1999년 강원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500m 은메달을 목에 거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비록 올림픽 메달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1990년대 열악한 훈련 환경 속에서 김윤만과 함께 한국의 스피드스케이팅을 올림픽 메달권으로 끌어올린 인물이었다. 이는 토리노와 밴쿠버에서 쾌거의 밑거름이 됐고,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체육훈장 거상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춘천시청 스피드 스케이팅팀의 감독을 맡았으며, 국제심판과 해설위원으로도 활약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에 꾸준히 기여해왔다. 지난 2016년 7월 고향인 의정부시청 빙상단의 감독으로 부임해 이강석 코치와 호흡을 맞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1999년 6월 10일 스포츠서울 8면>


10년을 벼른 金 입맞춤


한국 빙상 단거리 2인자로 눌려 지내던 제갈성렬(상무)이 마침내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제3회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4일째인 7일 헤이룽스케이팅센터에서 벌어진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 2차 레이스에서 제갈성렬은 36초 87을 기록, 두 차례 레이스 합계 1분 13초 57로 일본의 다카히로 하마미치와 공동 1위를 차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스피드 스케이팅의 맏형. 서울 화계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스피드 스케이팅을 시작, 의정부고등학교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뽑혀 올해로 10년째 태극마크를 달고 있는 베테랑.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이렇다 할 기록을 내지 못하고 대표팀 후배인 김윤만에 가려 그동안 2인자 자리에 머물렀다.


특히 1991년에는 대표팀의 강도 높은 훈련에 항의, 동료들과 태릉선수촌을 무단 이탈해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가 대회가 임박해 징계가 풀리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앞둔 1993년 11월에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월드컵 빙상대회에서 오른쪽 복숭아뼈가 부서지는 부상으로 올림픽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열악한 야외 빙상장에서 훈련하는 제갈성렬.


1990년대 한국 빙속은 김윤만과 제갈성렬, 두 사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약 13년 동안 태극마크를 달고 빙상을 누볐다.


은퇴 전 1999년 강원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제갈성렬.


이규혁은 2003년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제갈성렬의 지도 아래 2관왕을 차지했다. 왼쪽은 백은비.


제갈성렬은 굴곡진 커리어를 보냈다. 선수 시절 대표팀 감독의 불합리한 지도 방식에 반기를 들었다가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고, 올림픽을 앞두고 발목이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은퇴 후에도 오랜 기간 이끌어왔던 춘천시청 빙상팀이 갑작스럽게 해체되는 등 여러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그의 상처와 노력은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자양분이 됐다.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명단에서 제갈성렬을 찾을 순 없지만, '빙상 강국'이 된 한국 빙속사(史)에는 그의 이름 네 글자가 먼 훗날까지 또렷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차디찬 아이스링크를 누비며 불꽃같은 선수시절을 보낸 제갈성렬과의 인터뷰는 오는 11일 공개한다.


daeryeong@sportsseoul.com


사진ㅣ스포츠서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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