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최민지 인턴기자] 이젠 축구팬들에게 '사냐 아빠', '가레스 상윤'으로 더 친숙한 이상윤(48). 입담 만큼이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을 지나면 그의 축구 인생은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그라운드 주변을 맴돌았다. 그 결과 구수하고 시원시원한 해설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만난 그는 수많은 별명 중에서도 여전히 '팽이'란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렸다.


▲ 실력으로 증명한 K리그 MVP 자격


이상윤은 1990년 드래프트 1순위로 일화에 입단했다. 60kg 밖에 안 나가는 신체적 약점에도 1순위로 뽑혔던 것은 영리하고 센스있는 플레이 덕분이었다. 그는 "상대와 몸싸움에서 이길 확률은 없다고 판단했다. 기술적으로, 영리하게 뛰면서 상대를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렸을 때부터 그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입단 당시에도 감독님이 그 점을 보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도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헛다리 짚기'다. 이영표 전 국가대표의 트레이드마크로 잘 알려졌지만, 최초로 선보인 건 이상윤이었다. 그는 "외국 선수들이 하는 걸 보고 모방했다. 체력적으로 힘들어질 때 써먹으면 좋았다"며 "이영표 선수가 많이 노출시킨 게 사실이다. 그래도 '이상윤의 축구'를 알고 기억하는 팬들도 있을 테니까 굳이 원조를 내세울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93~95시즌 이상윤의 소속팀 일화는 K리그 3연패를 달성했다. 이상윤은 "박종환 감독님이 워낙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데 능력이 좋으셨다"며 "고정운, 신태용, 박남열 등 개성있는 선수들이 점차 배출되면서 팀이 탄력받았다"고 회상했다. 경기장만 나가면 선수들 모두가 승부욕에 불타올라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넘쳤다고.


이상윤은 '팽이'라는 별명을 증명하듯 "당시 정말 많이 뛰었다"고 설명했다. 계속 뛰어 돌아다니다 보니 상대 수비수들이 '이상윤은 제자리로 돌아올 테니 안 쫓아가도 된다'고 했을 정도였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뛰어다녔다는 그는 93년도 기자들의 선택을 받아 K리그 MVP까지 차지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이 한 마디에 힘을 실었다. "실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그땐 살아남을 수 없었다."


▲ 불운했던 월드컵 스타


1990년 첫 태극마크를 단 이상윤은 A매치 데뷔전이었던 노르웨이와의 평가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하며 눈도장을 찍었다. 전날 좋은 꿈이라도 꿨냐는 물음에 "그런 건 없었다"고 손사래치며 "내 앞에 떨어진 공을 다이렉트로 차면서 '골이다'라는 직감은 들었다. 그때도 정말 많이 뛰었다. 활동량이 많았고, 체력이 뒷받침돼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답했다. 하늘 같은 선배들도 정말 많이 뛴다며 인정한 활동량이었다.


그러나 정작 월드컵에서는 불운했다. 그해 이탈리아월드컵에선 벤치만 지켰다. 선배들의 기에 눌렸던 이상윤은 감독님께 출전시켜달라고 어필할 엄두도 못 냈다고 했다 . 마지막 경기에서 교체 출전 가능성도 있었지만 경험이 부족했던 새내기 이상윤은 결국 선택받지 못했다.


1993시즌 K리그 MVP를 수상하고도 1992년 다이너스티컵 이후 한동안 국가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이상윤은 "다이너스티컵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졌다. 진짜 열심히 뛰었는데 김호 감독님이 열심히 안 뛴다고 하시더라"라며 그 시절 기억을 끄집어냈다.


이어 "대표팀에서 위치가 모호했다. 명단에 이름은 올려도 경기는 못 뛰고. 속상한 마음에 경기 후 '대표팀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인터뷰했다. 그게 화근이 됐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후 엄청난 후회가 뒤따랐다. 그는 "악의 악순환이었다. 엄청 후회했다. 어쨌든 대표팀이란 게 선택받은 거고 축구 선수로서 자존심인데 내 생각이 짧았다"고 고백했다.


1998프랑스월드컵 역시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상윤은 "90년에 못 뛰었던 한을 푸는 장이었다. 워밍업 때 공을 맞는 순간 내가 준비를 정말 철저히 했나, 예선전하고는 또다른 본선 무대인데 준비를 많이 했나 등 여러 생각이 들더라"며 "감독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출전한 것도 후회된다. 첫 경기를 쉬었다면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불운했던 대표팀 시절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프랑스와 악연 아닌 악연


"프랑스 이적은 도피였다."


이상윤은 2000년 FC 로리앙 이적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프랑스월드컵은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상처로 남았다. 도피이자 도전으로 프랑스행을 결심했지만, 그마저도 잘못된 선택이었다. 데뷔전은 괜찮았다. 그래서 다음 경기도 선발로 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조커로 활용하려 했던 감독이었고, 히든카드 역할은 맞지 않았던 이상윤이었다.


통역도 없어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그는 "얘기를 못 하니 그 사람들의 속내를 모르겠더라. 내가 왜 못 뛰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이와 관련해 얘기할 기회도 없었다. 선수로서 인정받지 못한 점이 가장 힘들었다"며 "선수들도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이 있었다"고 힘들었던 점을 토로했다.


주변에서는 프랑스보다 일본을 선택했으면 좋았을 거란 얘기도 있었다고. 로리앙을 떠나면서 터키 행도 고려했지만, 프랑스에서도 실패했는데 터키라고 성공할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는 이상윤은 "애초에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를 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뒤늦은 아쉬움도 든다"고 밝혔다. 돌이켜보면 98년 월드컵 때부터 좋지 않았던 프랑스에서 기억, 악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컨디션 난조로 제정신이 아닌 채로 치렀던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 경기장이 마르세유 경기장이었다. 당시엔 그것도 몰랐다. 로리앙에서 원정 경기를 위해 마르세유 경기장을 방문했는데 왠지 낯이 익더라. 그날도 교체돼서 뛰었는데 찬스가 있었지만 결국 놓쳤다. 3-1로 로리앙이 졌다."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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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최민지 인턴기자 julym@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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