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병학 인턴기자] "지금 당장 예측하기엔 이르지만 대표팀이 지금 상태로 러시아에 간다면 잘해봤자 1무 2패 정도가 아닐까요? 태극마크의 무게감을 느끼고 지금부터라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써 내려갔던 선배 송종국(38)의 뼈있는 조언이다. 이는 단순히 월드컵 무대를 먼저 경험해봤다고 해서 나온 말이 아니다. 유럽과 한국, 중동 등을 오가며 희로애락을 겪었던 송종국의 경험에서 우러난 진심어린 충고였다.


최근 경기도 화성시 동탄의 송종국스포츠센터에서 그를 만나 20여년의 축구 인생을 돌아보는 한편, 2018 러시아 월드컵 성공을 위한 이야기도 나눴다.


▲ 히딩크와 월드컵, 지금의 송종국을 만든 둘


송종국은 학창시절 때부터 유명했다. 소위 '엘리트 코스'라 불리는 청소년 국가대표 과정을 다 밟았고 프로축구 부산 아이콘즈(현 아이파크)에 입단한 첫해 돋보이는 활약으로 신인상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의 축구 인생이 제대로 펼쳐지기 시작한 시점은 히딩크 감독을 만나고 난 후부터였다.


그는 "그전까지는 단순히 그냥 죽어라 뛰기만 하는 선수였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을 만나고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고나서부터 진짜 축구에 눈을 뜨게 됐다"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좀 더 창의적이고 효율적으로 경기장을 이용할 줄 아는 선수가 됐다. 2002 월드컵은 나의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이라고 말했다.


히딩크 감독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던 송종국은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필드 플레이어 중 유일하게 풀타임을 소화하며 '히딩크의 황태자'로 거듭났다. 4강까지 오르면서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 숱한 강팀을 만났지만 송종국에게 '백미'는 바로 16강 진출이 걸린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였다.


당시 포르투갈에는 스페인 명문 클럽 레알 마드리드의 실질적인 에이스 루이스 피구가 있었다. 송종국은 "포지션 상 내가 피구를 맡게 됐다. 설렌다는 감정보다는 걱정과 긴장이 앞섰다. 경기를 준비하는 내내 영상을 보며 피구의 플레이를 눈으로 익혔다. 실제로 피치 위에서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 긴장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준비 과정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그날 피구는 송종국을 단 한 번도 뚫지 못한 채 경기에서 철저하게 무기력했다. 피구를 필두로 포르투갈 선수들은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한국에 1-0으로 패해 일찌감치 짐을 싸서 고국으로 돌아갔다. 피구라는 핵심 요원을 완벽하게 막아낸 송종국의 공이 컸다.


송종국은 "처음 만났을 때 피구가 드리블로 나를 제치려고 하는 게 보이더라. 근데 움직임이 생각보다 예리하지 않았다"며 "두세 번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 나니깐 '할 만 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피구도 그냥 평범한 선수처럼 보였다"고 떠올렸다.


▲ 목전에 두고 결렬된 토트넘 行


2002 한일월드컵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송종국은 숱한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아스널과 토트넘 홋스퍼도 포함돼 있었다. 송종국은 "아스널 측에서도 문의가 들어왔지만 임대 제의였다. 반면 토트넘은 다년 계약에 완전 이적을 제시하며 적극적인 구애를 펼쳤다. 잉글랜드 입성이 꿈이었던 만큼 정말 가고 싶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잉글랜드로 가는 길은 막혔다. 당시 소속팀인 부산 때문이었다. 송종국은 "부산은 이적보다 임대를 원했다. 금액적인 부분에서도 입장 차이가 꽤 컸던 걸로 기억한다.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다가 결국 결렬됐다. 그날 너무 화가 나서 짐 싸들고 그냥 집으로 와버렸다"고 전했다.


토트넘과 계약 결렬은 아쉽지만 여전히 유럽을 향한 길은 열려 있었다. 몇 팀들의 제의가 남아 있었고, 최종적으로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페예노르트로 행선지가 결정됐다. 자신이 원했던 리그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2~3년 정도 커리어를 쌓다가 다시 잉글랜드 무대를 노크해볼 심산이었다.


▲ 우여곡절 가득했던 유럽생활


우여곡절 끝에 페예노르트의 선수가 된 송종국은 데뷔시즌부터 인상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오노 신지와 반 호이딩크의 골을 어시스트해 팀의 5-1 대승을 이끌었고, 이어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유벤투스 전에서는 에드가 다비즈, 파벨 네드베즈 등 월드클래스 선수들 사이에서 맹활약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네덜란드 리그도 쉽게 생각했다. 첫 시즌 때 주로 오른쪽 풀백과 윙을 번갈아 맡았는데, 아르연 로번,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등 많은 선수들과 경기장에서 붙었다"며 "로번은 처음 만났을 땐 내가 압도했다. 그 후로 몇 번 더 만났는데 정말 막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탄탄대로를 달릴 것만 같았던 송종국은 새 시즌이 찾아오자마자 부상이라는 시련을 겪었다. 그는 "왼쪽 발목 아킬레스건을 크게 다쳤다. 두 달 정도 치료를 받고 복귀전을 가졌는데 똑같은 부위를 발로 차이며 또 부상을 입었다. 그때의 여파로 지금까지도 왼쪽 발이 쭉 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 감독이 독일 도르트문트로 떠난 것도 컸다. 후임으로 루드 굴리트 감독이 내정됐지만 사이가 좋지 못했다. 송종국은 "굴리트 감독의 훈련 방식이 나와 맞지 않았다. 이를 두고 몇 번 마찰을 겪었다"며 "부상도 겹치고 팀 내에서도 불화가 생겼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2005년 송종국은 결국 팀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이 소식을 들은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당시 자신이 맡던 독일 분데스리가의 묀헨글라트바흐로 오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이 제의마저 거절하고 국내로 돌아갔다.


그때 상황에 대해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후회가 된다. 결국 목표였던 잉글랜드 리그에 가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박지성이 힘들었던 시절 히딩크 감독 덕분에 겨우 견뎌냈듯이 나도 판 마르바이크 감독이 계속 있었다면 유럽에 남아 있었을 거다"라며 "나에겐 그런 안식처조차 없었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아쉬워했다.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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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스포츠서울 DB, 김도형 기자 wayne@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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