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권준영기자]배우 나문희(76)가 데뷔 56년 만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한해 여우주연상 4관왕에 오른 나문희는 안방극장은 물론 스크린, 시상식 무대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여과 없이 발휘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70대 여성 배우의 유례 없는 여우주연상 수상 독주는 한 편의 영화로부터 시작됐다. 나문희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로 데뷔 이래 처음으로 영화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올킬하는 쾌거를 이뤘다. 여기에 올해의 여성 영화인상 대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여성 영화인 모임 후보선정위원회 측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나문희에게는 여전히 연기력의 정점에 있음을, 영화계에는 여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선택임을 증명하는 기회가 됐다"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나문희는 지난 10월 제1회 '더 서울어워즈'를 시작으로 제38회 청룡영화상,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이하 영평상), 그리고 최근 발표된 제17회 디렉터스컷 시상식까지, 연말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베테랑 배우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지난 9월 21일 개봉해 327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했던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소녀였던 나옥분(나문희 분)이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손에 이끌려 가족의 품을 떠난 후 친구 정심(손숙 분)과 함께 마주한 고통과 아픔을 그렸다.


휴먼 코미디의 외피를 입은 '아이 캔 스피크'는 따뜻하면서도 진정성있는 올곧은 시선으로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문희는 구청의 블랙리스트 1호 도깨비 할매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옥분 역을 맡아 실감나는 연기로 관객들을 몰입시켰다. 특히 현실감 넘치면서도 다채로운 연기를 펼쳐 제38회 청룡영화상에선 여우주연상과 인기 스타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시상식에서 나문희는 "아직도 이 나이에 인기 스타상이라니 정말 행복하다"면서 "일을 할 때도 전부 어린 사람들이었고, 여기도 전부 젊은 사람들인데 내가 그 틈에 끼어서 인기상을 받다니 참 좋다. 여러분도 한번 이 나이에 (상을) 받아보세요"라고 재치있게 말했다.


이어 "마음을 비우고 와야지 많이 생각했다. 그래도 또 이렇게 되니까 욕심이 많이 생겼다. 동료들도 많이 가고, 저는 남아서 이렇게 좋은 상을 받는데, 이렇게 늙은 나문희에게 큰 상 주셔서 감사하다"며 "저는 이렇게 남아서 앞으로도 열심히 하도록 하겠다. 후배들을 보면 너무나 잘해서, 한국 영화배우들이 전 세계에서 연기를 제일 잘 하는 것 같다"고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1961년 MBC 라디오 1기 공채 성우로 데뷔한 나문희는 연기에 대한 거듭된 갈망으로 배우로 전직했다. 이후 드라마와 영화, 연극무대를 넘나들며 오랜 시간 다진 잔뼈굵은 연기력은 연기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최고임을 확인시켰다.


그는 데뷔 이후 다수의 TV 드라마와 연극 무대에서 활약하며 '이 시대의 어머니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젊은 시절부터 누군가의 엄마, 다방 마담 등의 역할을 맡은 나문희는 쉽사리 대중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함께 데뷔한 동년배 배우들에 비해 전성기가 늦게 왔던 그는 연기에 매달려 사느라 어린 세 딸마저 남편이 도맡아 키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1975년 국내 최초 옴니버스식 일일연속극 '여고 동창생'으로 드라마에 첫 출연하면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렸다. 1990년대 초반까지 여러 작품 속에서 수많은 역을 소화해냈지만 오랜 기간 배우로서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1995년 드라마 '바람은 불어도'에서 이북 사투리를 쓰는 억척스러운 할머니로 분한 나문희는 대한민국 시청자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이를 통해 자신의 연기 인생 최초의 트로피인 KBS 연기대상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작품으로 이듬해 제32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인기상과 제23회 한국방송대상 여자 탤런트 상까지 휩쓸었다.


이후에도 활약을 이어오며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권위 있는 CEO , '장밋빛 인생'에서는 고약한 시어머니, '소문난 칠공주'에서는 춤바람난 할머니로 변신했다.


스크린에서도 맹활약해 2005년 영화 '주먹이 운다'로 제42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열혈남아'로 제7회 올해의 여성 영화인상 연기상, 제4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최고의 여자조연배우상, 제1회 대한민국 영화 연기대상 여우조연상, 제28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등 트로피를 휩쓸며 존재감 넘치는 조연배우임을 입증했다. 


그러던 중 2006년 가족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큰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나문희의 명대사 '호박고구마'는 젊은층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수많은 패러디의 소스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 '권순분 여사 납치 사건'에서 납치범을 쥐락펴락하는 권순분 여사, '하모니'에서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은 최고령 수감자 김문옥, '육혈포 강도단'에선 하와이 여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을 점거하는 은행 강도 김정자로도 열연을 펼쳤다.


전국 관객 수 865만을 동원하며 화제를 모은 '수상한 그녀'에서는 아들 자랑이 유일한 낙인 욕쟁이 칠순 할매 오말순 역을,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김영옥, 신구, 김혜자, 고두심, 윤여정, 박원숙 등 연기파 노장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 세대의 공감을 끌어내는 노년의 삶을 보여주며 호평받았다.


뛰어난 연기력은 물론 가슴 깊은 울림을 끌어내는 진정성있는 감정 표현으로 매 작품 시청자 및 관객을 사로잡는 나문희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국민 배우', '국민 엄마'이자 여배우들의 대표적인 롤모델로 손꼽히고 있다.


나문희가 데뷔 56년 만에 70대의 나이에 공로상이 아닌,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연기에 대한 거듭된 갈망과 끊임없는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변함없는 연기 욕심이 지금의 '배우 나문희'를 지탱하고 있는 비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주위 후배 배우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매 작품마다 화제를 모으며 연기 변주를 해온 나문희가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넘나들며 다시 한번 정점을 찍을 수 있을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kjy@sportsseoul.com


사진ㅣ스포츠서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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