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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순도높은 정보는 올바른 정책결정의 바로미터다. 한국의 체육정책은 그런 점에서 늘 불안했다. 어찌된 일인지 체육분야는 정책결정 단계에서 유독 훼손된 정보가 활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보 전달과정에서 실체와 고갱이가 자연스럽게 마모되거나 누락되기 보다는 특정인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정보를 조작하는 게 체육분야 정보 훼손의 도드라진 특징이다. 정보를 취급하는 정책결정자들의 태도 또한 문제가 있다. 다른 분야는 정책결정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체크하고 필터링을 하는 덕분에 정책결정 단계에서도 정보의 순도는 그나마 유지되지만 체육분야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빈번하다. 아마도 정책 결정자가 체육의 가치를 등한시한 탓일 게다.

훼손된 정보가 그릇된 정책결정으로 이어진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최순실 사태다. 정부가 체육개혁의 기치를 들고 체육계를 위협한 뒤 정보를 훼손한 비선라인이 밀실에서 체육과 국정을 농단한 게 바로 최순실 사태의 본질이다.

최순실 사태에 앞서 한국 체육행정의 난맥상을 고스란히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을 꼽자면 단연코 국제복싱협회(AIBA)의 전횡이 아닐까 싶다. 이 사건은 체육단체 사유화의 교묘한 진화라는 측면에서 잊을 수 없다. 국내 특정 파벌이 AIBA 고위 관계자와 결탁해 체육단체 사유화를 꾀한 게 AIBA 사태의 본질이다. 국내 복싱파벌과 결탁한 AIBA의 한국인 고위 임원 A씨가 국제연맹(IF)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국내 복싱은 물론 체육행정까지 쥐락펴락했다.

2009년부터 A씨가 해임된 지난해 6월까지 이어진 AIBA의 전횡은 한국 체육행정의 후진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도 남았다. 당시 자국연맹(NF)를 보호해야할 책임이 있는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까지 AIBA의 전횡에 침묵한 것은 물론 이름을 밝히기조차 부끄러운 두 명의 문체부 차관은 대한복싱협회의 관리단체 지정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국제 스포츠무대에서 ‘어글리 코리안’으로 악명높은 A씨는 한국에선 능력있는 국제 스포츠 전문가로 승승장구했다. 그가 자신의 실체를 숨기는 방식은 교묘했다. 정권이 바뀔 때면 늘 그렇듯 매스컴을 이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보기관의 리포트는 정부의 눈을 어둡게 했다. 문체부의 정책결정자들은 A씨를 국제 스포츠계의 ‘어글리 코리안’이 아니라 능력있는 전문가로 오인하는 실수를 되풀이했다.

A씨는 현재 자신을 해임한 AIBA 우칭궈 회장을 상대로 한 소송전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A씨를 심복으로 두고 AIBA를 효과적으로 지배했던 우 회장 또한 이번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A씨의 과거행태를 종합해보면 누가 더 나쁜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지난 주 내한한 우 회장은 한국 체육계에 A씨의 실체를 마침내 공개하고 사과를 구했다. 또한 A씨와 손 잡은 국내 복싱파벌의 편을 드느라 정당한 절차와 방식으로 대한복싱협회장에 뽑힌 유재준 전 회장을 낙마시킨 AIBA의 몰상식한 행동에 대해서도 고개숙여 용서를 구했다.

그동안의 사태 추이와 우 회장의 진심어린 사과를 종합해보면 결과적으로 자국연맹(NF)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문체부와 대한체육회는 훼손된 정보에 의해 잘못된 행정을 펼친 꼴이 됐다. 무려 7년이나 계속된 AIBA의 비상식적인 전횡을 두손 놓고 방치한 사실은 그냥 넘길 문제는 아니다. 더욱이 오랫동안 비상식적인 일이 반복된 데는 권력과 정치가 깊숙히 개입된 정황마저 감지돼 조속한 조사도 필요한 상황이다. 권력과 정치가 올바른 판단을 가로막고 정보를 훼손했다면 그건 범죄다.

AIBA 사태는 정보의 훼손과 습성화된 망각이 판치는 한국 체육의 아킬레스건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정책 결정자들이 훼손된 정보를 근거로 일을 처리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잘못된 과거를 그냥 잊고 넘어가는 건 더 큰 과오를 잉태하는 원흉이 아닐 수 없다. 일이 잘못되면 “몰라서 그랬다”고 슬쩍 눙치고 넘어가는 고질적인 버릇을 이번 기회에 바로잡자. 모르는 것도 죄다. 적어도 공공의 일을 책임있게 처리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그렇다.

부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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