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딩동

[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MC딩동(38)은 최근 KBS2 ‘1박 2일’에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나서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차세대 예능 기대주로 꼽히게 손색이 없는 활약상이었다. 그는 대중에겐 아직 낯선, 스스로의 표현대로 아직 ‘듣보잡’일 수 있지만 사실 방송가, 가요계 등에서는 최고의 행사MC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 SBS 공채 개그맨 출신인 그의 행사MC 경력만 10년. 적어도 방송국 사전MC, 가요 쇼케이스 및 팬미팅 등의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진행 능력과 순발력을 뽐낸다. ‘재야의 유재석’이라는 타이틀이 괜히 붙은게 아니다.

MC딩동을 만나 그가 생각하는 행사MC의 매력, 노하우, 방송계 진출 의욕,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어보았다.

-2007년 SBS 공채 개그맨 출신이다.

2007년 신인개그맨 선발대회 대상을 받았다. 내가 상을 받았을 때 인천에서 식당을 하는 어머니가 소주10짝을 쌓아놓고, 아들을 언급하는 손님께 한병씩 줬다. 나도 인생이 달라질 줄 알았다. 드디어 고시원에서 탈출하는구나 싶었는데, 뭘 할 겨를도 없이 개그 프로그램 ‘웃찾사’가 사라졌다.

서른살 때 어머니가 전화를 해선 “사람들을 재밌게 해주고, 웃음을 주는 것도 좋은데, 엄마도 재밌게 해줘”라며 방세를 보내더라. 그때 깨달았다. ‘모르는 사람들은 재밌게 해주면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재미 있게 해준 적이 없구나.’

2006년부터 활동했던 대학로 연극 극단에서 그때 나와서 2008년부터 결혼식, 돌잔치 등에서 MC를 보기 시작했다. 빨리 세상과 타협하고, 방세를 내야 했다. 사실 개그맨 공채 출신이지만 내 꿈은 원래부터 MC였다. 유재석, 신동엽, 김용만 등 당대 최고의 MC들이 다 개그맨 출신이라 그 과정을 거치는 게 정석 같았다.

-무명 생활이 길었는데 힘든 적은 없나.

지금도 무명이고, 지금도 슬럼프다.(웃음)

-무명 시절, 일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서른살 때 어머니께 전화로 “나 그만 둘까? 인천 내려가서 열심히 살까?” 물었다. 어머니가 “안돼. 많은 사람한테 네 얘기를 해둬서 네가 그만 두면 안돼. 좀 더 하다 와”하더라. 한석봉이 된 줄 알았다. 그때 그냥 버텼다.

천안함 사건이 터진 2010년 무렵에는 대학로 집(보증금 500만원, 월세 20만원 반지하)에서 인천까지 갈 2000원이 없어 갈 수 없었다. 종로5가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데 동인천까지는 못가겠더라. 냉장고도 없고, 찬장에 먹을 것도 없었다. 누가 술사준다면 나가서 안주만 먹었다. 서울서 만난 친구한테는 2000원 꿔달라는 말도 못하겠더라.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뼈속까지 천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힘든 상황을 그만 멈추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멈추고 싶다는 건 극단적인 생각도 해봤다는 말인가.

다행히 한강을 가고 싶어도 한강에 갈 차비가 없었고, 만약 연탄가스를 마시고 싶었다 한들 연탄을 살 돈이 없었다. 겨울에 추우면 방의 컴퓨터를 켰다. 그럼 예열이 돼 따뜻해질만큼 방이 좁았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길진 않았다. 원래 다 이런 거라고 믿었다. 위인전 고정 레퍼토리를 봐도 다 시련을 겪지 않나. 잘되기 위한 과정이구나 스스로 마음을 다졌다.

열심히 살았다. 불교신자인데 교회 행사도 가봤다. 결혼식 재혼 사회도 많이 해봤다. 초혼 때 사회를 봤는데 잘한다고 재혼 때 다시 부른 분도 계셨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했다가 싸늘한 시선을 받았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사전MC를 할 때, 한번은 녹화를 마치고 방청객 수백명과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뒷통수가 따갑더라. “차가 없으세요?” 물으면 “저기 오잖아요. 163번”이라고 답했다. 딱해 보였는지 내 버스비를 내준 커플 방청객이 있었다. 그 두분 결혼식, 돌잔치 사회를 봐드렸다.

-무명 시절, 일이 없을 때는 어떻게 훈련했나.

사람들을 많이 만나 얘기를 많이 했다. 멘트를 일부러 공부한 적은 없고. 재미있는 사람,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재야의 고수를 만나 자극을 받았다. 만날 사람이 없으면 시장에 갔다, 시장에 가면 말을 시키니까. 재래시장에 가면 기본이 4~5시간이었다. 대형마트에 가서 수족관, 시식코너, 안마의자 등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방송국엔 들어갈 방법이 없어 가지 못했다. 다른 행사 MC가 하는 걸 보기 위해 동대문 쇼핑몰 같은 데를 갔다. 한번은 쇼핑몰에서 어떤 MC의 진행을 보며 메모를 하고 있는데 내게 오라고 손짓을 하는 거다. 내 메모를 달라더니 찢더라. “훔치러 왔구나? 너 도둑질하러 왔구나?”라고 했다. 그때 결심했다. 내가 당신보다 잘되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함께 다니는 동생들에게 나는 숨기는 게 전혀 없다.

MC 딩동
MC 딩동.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평소 신동엽을 많이 따르는 편인데.

동엽 형이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준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신동엽은 행사MC, 개그맨에겐 교과서다. 한마디로 수학의 정석 저자에게 수학을 배우는 거다. 내가 SNL 사전MC를 보면 동엽 형이 객석에 앉아서 계속 지켜본다. 그리고 늘 피드백을 해준다. “‘마이’라고 하지 말고 재킷이라고 표현해야 방송에 나간다.”는 말부터 “변리사가 아니라 별리사”, “실라가 아니라 신라”같은 발음 교정까지, 또 게스트에 대한 손동작까지 세심하게 지적해준다. 나뿐 아니라 함께 다니는 내 MC 동생 2명의 용돈까지 챙겨주신다. 곧 수요미식회에 방영될 식당이라고 함께 가자고 해주시는데, 가면 수요미식회가 아니라 인생술집이 된다.

동엽 형 뿐 아니라 유희열 형도 잘 챙겨주신다. 진행하는 걸 보며 많은 걸 배운다. 예전에 쇼핑몰 앞에서 내 메모장을 찢은 행사MC를 안 따라다니길 잘했다. 그가 내게 던진 건, 내 메모장을 찢은 종이조각이 아니라 알고보니 꽃가루였던 거다.

-이제는 수입이 상당하겠다.

소득이 상위 0.5% 정도 되더라. 그렇게 된지 얼마 되진 않았다. 그전엔 상위 90%였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뚜벅이로 다니다가 2010년 흰색 모닝을 샀다. 좋은 차를 싸게 사고 싶어 모닝 카페에 회원가입해 열심히 발품을 팔아 사서 2013년까지 탔다. 다음 차는 무조건 연예인차를 사겠다는 꿈을 꿨었다. 2년 전 카니발, 그것도 카니발 하이리무진을 일시불로 샀다. 사자마자 튜닝 회사에 보내 연예인 타는 차 중 다섯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바꿔달라고 했다.

-MC로서 목표는.

내년이 MC딩동이란 이름으로 MC를 시작한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토크 콘서트도 생각하고 있고, MC를 꿈꾸는 친구들을 위해 열고 있는 아카데미도 이어가고 싶다. 나를 따르는 MC 후배 2명(MC배, MC준)의 인생을 책임질 순 없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좋은 기술을 함께 공유하는 거 같아서 행복하다. 이 정도만 해도 성공한 것이다.

방송적인 측면에선 언젠가 KBS 연예대상 공로상을 받고 싶다. 나는 우렁각시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큐시트에 내 이름은 없다. 왜? ‘밴드 교체’가 내 이름이다. 불후의 명곡에선 ‘무대 전환’이 내 이름이다. 슬프진 않은데 사람들이 슬프게 보니까 언젠가 KBS가 원로들만 주는게 아니라 현실적 도움을 주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그런 공로상을 주지 않을까 바람이 있다. 녹화장에서 차를 빼달라는 공지도 내가 한다.(웃음)

재야 MC들에게 뭔가 도움되고 싶기도 하다. 그러려면 내 말에 영향력이 생겨야 한다. MC계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싶다.

monami153@sportsseoul.com

<MC 딩동이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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