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호 우승
14일(한국시간) 미국 뉴욕에서 막을 내린 2017 버호벤 오픈 3쿠션 마스터스에서 한국인으로는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 조재호가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제공 | 코줌코리아

[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 “4대 천왕을 연달아 이길 줄 몰랐어요.”

수화기 너머 들려온 한국 3쿠션의 ‘슈퍼맨’ 조재호(37·서울시청)의 목소리에선 우승의 기쁨보다 ‘더 분발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늘 개인 뿐 아니라 한국 당구 전체 발전을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절실한 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재호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버호벤 오픈 마스터스를 제패했다. 세계랭킹 16위인 그는 14일(한국시간) 미국 뉴욕 플러싱의 캐롬 카페에서 열린 대회 결승전에서 에디 레펜스(벨기에·18위)에게 16이닝 만에 40-19 완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3쿠션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건 지난 2014년 2월 터키 이스탄불 월드컵 이후 3년 6개월 만이다. 이 대회는 1980년대 세계 당구계 톱스타로 활약한 고(故) 이상천을 기리는 대회로 세계캐롬당구연맹(UMB)과 미국당구연맹(USBA)이 공동 주관한다. 세계 톱랭커가 모두 참가하고 있다. 지난 2004년 고 이상천이 사망한 이듬해인 2005년부터 뉴욕에서 열렸다. 2008년까지 ‘상리 인터내셔널 오픈’으로 불렸고 이후 테이블 제조업체 버호벤이 스폰서로 참여하면서 버호벤 오픈으로 불리고 있다. 한국 선수가 처음으로 챔피언에 오른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 조재호는 우승 이후 스포츠서울과 전화통화에서 “월드컵 우승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회에서 모처럼 우승해서 기쁘다”고 말했다.

시드권을 받아 예선 2라운드서부터 출전한 조재호는 F조 1위(5승1패)로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16강에서 베트남의 응고 딘 나이를 누르고 8강에 안착한 그는 ‘4대 천왕’ 중 한 명인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세계 4위)을 상대했다. 하지만 한 번도 리드를 내주지 않으면서 22이닝 만에 40-25로 이기며 4강 고지를 밟았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결승행을 두고 겨룬 상대는 지난해 세계선수권 우승자이자 랭킹 1위인 다니엘 산체스(스페인)다. 조재호는 “솔직히 4대 천왕 두 명의 선수를 연속해서 이기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공격적인 샷을 앞세워 또다시 20이닝 만에 40-21 완승했다. 그는 “산체스와 워낙 친한 사이다. 경기 전 서로 장난도 했는데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한 채 경기한 것 같다. 솔직히 산체스가 몇 차례 샷에서 운이 따르지 않았지만 나는 운이 따랐다”고 말했다. 결승 상대는 터키의 강자 세미 세이기너를 꺾고 올라온 벨기에의 에디 레펜스(18위). 4대 천왕 두 명을 연달아 누른 조재호의 기세는 결승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4이닝에 20-4로 점수 차를 벌리면서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다. 16이닝에 40점 고지를 밟으면서 19점에 그친 레펜스를 잡는 데 성공했다. 조재호는 “세이기너 선수는 워낙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선수여서 부담이 되는 선수다. 레펜스도 물론 벨기에 챔피언으로 저력이 있으나 세계 대회 결승 경험은 적은 편이었다”며 “경기에 돌입하니 (레펜스가) 굉장히 긴장하더라. 나도 긴장했지만 상대가 더 긴장하니 오히려 부담을 떨친 것 같다”고 했다. 또 “초반 럭키 샷 2개가 들어가면서 스코어가 벌어졌다. 이후 레펜스가 쫓아오는 속도가 더디면서 수비보다 공격에만 신경쓰자고 했는데 잘 들어맞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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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3쿠션은 지난해 12월을 기점으로 8개월 사이 국제대회 타이틀 4개를 휩쓸었다. 조재호 이전에 월드컵에서 허정한(이집트 후루가다) 김행직(포르투갈 포르투)이 정상에 올랐고 세계팀선수권대회에서도 김재근 최성원 조가 한국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었다. 그야말로 제2 중흥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재호는 “그만큼 수준급 선수가 많이 늘어난 것도 있으나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맞대결할 땐 경쟁자이나 그 외엔 조력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건 맞지만 세계 톱랭커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조재호는 “진정 세계를 호령할 수준으로 가려면 우리도 (유럽처럼) 리그가 필요하다. 또 톱랭커와 더 많이 경기를 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돼야 한다”고 했다. 기본적인 기량은 우수하나 경기 경쟁력이 비교적 떨어진다는 게 조재호의 생각이다. 당구장 금연법이 통과되고 여러 기업체에서도 당구대회 후원을 하는 등 어느 때보다 당구에 대한 국내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는만큼 하루빨리 대형 스폰서를 찾아 유럽 못지않은 리그를 창설했으면 하는 게 모든 당구인의 바람이다.

조재호에게도 롤모델과 같은 고 이상천을 기리는 대회에서 정상에 우뚝 선 건 뜻깊은 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인은 매우 대찬 당구를 하셨던 것 같다. 늘 공격적이고 도전적이었다”며 “과거 내게 해주셨던 조언이 늘 생각난다. 그중 하나가 ‘패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상대가 마지막 한 점 남았을 때 ‘나보다 잘 쳤으니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다음엔 더 노력하자’고 다짐한다. 당구는 미세한 멘탈 스포츠인데 지는 게 싫어서 화를 참지 못하면 그 순간이나 앞으로도 좋지 않다. 선배 조언을 새기다 보니 실제 중요한 순간에 긴장이 덜 되고 내게 기회가 오더라. 페어플레이 정신도 기르면서 상대도 나를 더 존중하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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