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저승에 홀로 잠들었건만 (1970년 1월 18일)  




총각시인(詩人)과 가버린 임과의 결혼식 


27세의 젊은 시인이 죽은 약혼녀의 사진을 들고 결혼식을 올렸다. 마침 이 날은 죽은 약혼녀의 4·7제(만 28일째)를 지내는 날이자 두 사람의 결혼식 날로 택일해 두었던 날. 싸락눈이 내리던 1월 10일 서울 신흥사(新興寺)에서 있은 일이다.  


독경속에 사진 안고 입장 손님들이 먼저 울어 버려 


이 날 하오 3시. 신흥사(新興寺) 대법당은 조촐한 결혼식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신랑 XXX군, 신부 XXX양의 결혼식장이란 알림쪽지도 붙어 있지 않았다. 법당안엔 주례를 맡아 볼 주지스님과 25명 남짓한 하객(?)들이 말없이 앉아 있을 뿐. 


이윽고 대법당의 문이 열리고 신랑 성영일(成英一·27·서울성북구)이 검은 띠를 두른 신부의 사진을 들고 입장했다. 「웨딩·마치」대신 주지스님의 독경소리가 낭랑했다.  


약 10분간에 걸린 이 산신랑과 죽은 신부의 결혼식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이따금 결혼식을 축하하러(?) 온 하객들이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뿐. 식이 끝나기 전에 끝내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신부의 어머니가 터뜨린 울음을 신호로 결혼식장 안은 온통 울음 바다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끝내 울지 않은 단 한사람이 있다. 신랑 成군이었다.  


成군은 식이 끝날 때까지 울지 않았을 뿐더러 식이 끝난 다음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장인·장모를 부축해 약1백m 떨어진 피로연 식장까지 모셔갔다.  


성급한 놀이꾼들의 장구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열린 피로연 식장서도 신랑은 끝내 울지 않았다. 


이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모두 신부쪽 일가친척들. 신랑쪽이라곤 신랑의 절친한 친구 3명밖에 없었다. 신랑쪽 부모는 물론 친척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목메이는 울음 참던끝에 신랑은 신부이름을 외쳐 


1시간반 남짓한 피로연이 끝나고 하객들이 모두 돌아간 뒤 맨 마지막으로 신랑 成군이 친구들과 함께 눈 길을 내려왔다. 길이 미끄러워서였을까? 신랑 成군은 비탈길을 내려오다 그만 눈구덩이위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신랑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영아야- 』 


두 남녀가 서로 알게 된 것은 두 사람 모두 20세 되던 해 여름이었다. 당시 대학교 2학년생이던 成군은 우연한 모임에서 이영(李映·가명·신랑과 동갑)이란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E여고를 졸업, E여대 가정학과에 재학중인 아가씨였다. 


두 사람은 서로 첫 눈에 사랑을 느껴, 이후 7년동안 한시도 보지 않고선 못견딜 사이가 되었다. 신랑 成군은 H고교를 졸업, 모대학 불문과를 졸업했고 62년도엔 모신문 신춘문예 詩 부문에 당선하기도. 


李양은 D철강 사장을 아버지로 둔 6남매의 셋째 딸. 


6남매중 가장 똑똑하다하여 온 집안의 귀염을 독차지해온 아가씨였고 成군은 장남. 두 사람의 사랑은 여러 차례 파란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끝내 69년 12월6일 약혼식을 갖게 되었다. 


12월6일 약혼하면서 두 집안서 결혼날짜로 택일해 두었던 날이 바로 1월10일. 


그러나 죽음의 신이 돌연 덮쳐왔다. 약혼식이 끝난지 나흘뒤인 12월10일, 李양은 원인모를 고열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급히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월12일 병상에서 숨지고 말았다. 정확한 병명은 의사들도 내리지 못한 채 사망진단서엔 급성뇌염으로 적혀 있었다.  


장인·장모는 가슴이 아파 훌훌 서울을 떠나버리고  


처음엔 成군의 집은 물론 李양의 집에서도 펄쩍 뛰었다. 成군의 장인이 될 李양의 어버지까지도 『내 딸을 잊지 못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젊은 사람이 장래를 생각해야지』 


하며 극구 말렸다. 


그러나 成군은, 막무가내. 


두 집안에서 다 반대하면 혼자서라도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우겼다. 마침내 李양 집에선 成군 부모들을 찾아가 동의를 얻은 뒤 결혼식을 올리기에 이른 것이다. 


결혼식이 끝난 뒤 成군의 장인은 成군을 「자네」라고 부르며 하루 빨리 자기딸을 잊고 새 장가를 가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언제든 우리 집을 찾아오면 사위 대접을 하겠다』고.  


죽은 딸에게서 사위를 본 이 장인·장모는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날인 11일 아침 9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가슴에 맺힌 슬픔이 풀릴때까지 서울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 


그러나 이 날 제주도에 갔어야 할 장본인은 成군과 죽은 李양. 즐거운 신혼여행길에 올라 있어야 할 신랑 成군은 결혼식 올리던 날 밤 윗 동서와 친구들과 어울려 무교동 거리에서 술에 취해 있었다. 


술취한 신랑은 친구에게 “그녀는 어엿한 나의 부인” 


成군은 친구들에게 『비록 육체는 없어도 영아는 이제 내 본부인이란 말야』 하며 주정을 했다. 


그가 굳이 결혼식을 고집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 이유가 李양과의 결혼식을 올려 눈 감지 못하고 죽었을 李양을 위로해 주자는 것. 둘째는 자기자신을 위해서.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자기사랑을 정리하고 싶었다고. 다음이 장인·장모들을 위한 마음. 


평소 자기를 친아들 이상으로 잘 대해주던 장인·장모에게 결혼식으로나마 효도를 하고 싶었다고. 


아직 27세니까 물론 앞으로 다시 결혼해야 할 젊은이다. 成군 자신도 다시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成군에 의하면 그 결혼은 자신에게 재혼이 될 것이며 李양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조강지처로 있으리라는 것. 


『누군들 재혼이야 안하느냐?』는 게 成군의 주장. 


결혼식 날 밤 成군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 李양이 생전에 보내온 사랑의 시들을 읽었단다. 이틀 뒤인 12일 월요일 成군은 아침 9시정각, 직장에 출근했다. 


<서울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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