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다리
최근 세계선수권에서 정강이를 다친 뒤 8바늘을 꿰맨 이승훈이 부상 부위를 취재진에게 공개하고 있다. 오비히로 | 김용일기자 kyi0486@sportsseoul.com

[오비히로=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 “내일 실밥 뽑아요.”

23일 일본 오비히로 포레스트 오벌. 제8회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4관왕 위업을 달성한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장거리 간판 이승훈(29·대한항공)은 공동취재구역에서 만난 취재진 요청에 부상 부위를 공개했다. 많은 기자가 몰린 탓에 오른쪽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최근 8바늘을 꿰맨 정강이를 보였다. “아이고”하며 취재진 너나 할 것 없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승훈의 정강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내일 실밥 뽑는 날”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부상 투혼은 참 결실을 맺었다. 이날 남자 매스스타트에 나선 이승훈은 8분12초72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앞서 5000m와 1만m, 팀추월에서 금메달을 따낸 그는 주 종목인 매스스타트까지 휩쓸면서 4관왕을 차지했다. 전날 1만m 우승으로 동계아시안게임 통산 6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며 안현수(빅토르 안)가 보유한 한국인 동계 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5개) 기록을 경신했다. 이날은 7번째 금빛 레이스였다. 이는 동·하계 아시안게임을 합쳐 한국 스포츠사의 기념비적인 일이다. 이제까지 하계 아시안게임에서 최다 금메달을 기록한 이는 서정균(승마) 양창훈(양궁) 박태환(수영)으로 모두 6개다. 이승훈이 매스스타트까지 금메달을 따내면서 동하계 통틀어 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 보유자가 됐다. 지난 10일 강릉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종목별 세계선수권 남자 팀추월 도중 오른 정강이를 자신의 스케이트날에 베이는 부상을 입은 이승훈이다. 8바늘을 꿰맸고 이후 훈련도 하지 못했다. 아시안게임 참가를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잡았는데 팀 추월 금메달을 바라본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전격적으로 출전을 강행했는데 빛나는 성적표를 받았다. ‘이승훈 날개’를 단 덕에 대표팀 내 김민석(18·평촌고) 등 차세대 대들보들이 병역혜택까지 받아 선수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승훈은 “사실 (강릉에서)부상당한 뒤 시즌을 접으려 했다. 통증이 심했다”며 “사흘이 지나니까 통증이 없어지더라. 스케이팅을 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애초 강릉에서 후배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팀추월하고 매스스타트만 생각하고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5000m, 1만m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도 놀랐다”고 웃었다. 이승훈의 불굴의 의지, 희생정신을 하늘도 감동했는지 이상하리만큼 오비히로에 왔을 때 몸 상태가 더 좋아졌다고 한다. 그는 “내가 1만m를 뛰면 기록이 좋든 안좋든 몸살 기운이 늘 왔다. 그런데 이번엔 멀쩡하더라”며 “이번 대회엔 희한하게 몸이 좋다”고 말했다. 전날 팀추월 금메달을 따낸 뒤 1500m에서 깜짝 금메달을 거머쥐며 2관왕에 오른 김민석은 “투혼을 발휘한 선배 모습이 본보기가 됐다. 4관왕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부상이 아니고 최상의 몸상태여도 쉽지 않은 데 축하드린다”며 고마워했다. 결과도 결과지만 과정에 있어서 자신보다 열 살 이상 어린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 그는 후배들에게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강한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체력도 안 된다. 평범한 선수가 되고,넘버 원이 될 수 없다”며 “어느 수준에 도달했을 때 지도자가 얘기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거나 내 생각을 주입하게 된다. 그런 것을 참아야 한다. 일관하게 초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신에게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할 것을 권고한 ‘스승’ 전명규 한국체대 교수 얘기를 꺼냈다. “그 분은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더 하라면서 끌고가는 스타일인데 그런 분이 계셨기에 이 나이에 좋은 체력을 유지하면서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난 어릴 때보다 더 운동하려고 노력한다. 기록 자체가 (2010년)밴쿠버 올림픽 직전보다 더 좋은 이유다.” 열흘 만에 부상 악몽에서 벗어나 화끈한 반전을 펼친 이승훈에게 오비히로는 또다른 도약의 땅으로 기억에 남게 됐다.

한편 이날 여자 매스스타트에선 김보름(강원도청)이 일본의 다카기 미호, 사토 아야노의 협공에 대처하지 못하면서 동메달에 그쳤다. 22일 여자 50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그는 3000m와 팀 추월에서 은메달 2개를 포함해 이번 대회에서 4개의 메달을 따냈다.

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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