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당구대가 가장 많이 보급되어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에는 1565년 스페인에서 플로리다로 처음 당구가 전해지면서 남북전쟁(1861~1865)을 전후로 당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859년 4월에는 디트로이트에서 1만5천 달러를 놓고 마이클 펠란과 존 세레이트가 승부를 겨룬 최초의 상금대회 ‘4구 내셔널선수권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미국 60년대 이민자들 몰려들며 당구의 본질 무너져


역대 미국 대통령들도 당구를 즐겼다.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등은 백악관에 있는 당구장에서 게임을 했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게임을 즐긴 당구광이었다고 한다. 빌 클린턴은 유세 중에 당구클럽에서 게임을 하는 장면이 ‘워싱턴포스트’지에 실리기도 했다. 1947년에는 미국 전역 457개 대학에 당구테이블이 설치돼 학원 스포츠로 출발을 알렸고, 가족 스포츠로도 발전해 1960년경에는 약 400만 가정에 당구 테이블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에서 당구는 건전 스포츠로 인기를 누렸지만 1960년대 이민자들이 급증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또 영화 산업의 발전과 함께 당구장이 폭력적, 선정성의 소재로 쓰이면서 당시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당구에 대한 인식 왜곡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당구,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담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려진 당구장의 이미지는 자욱한 담배연기와 함께 당구대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거나 심한 노출의 여성, 폭력 장면 등 건전 스포츠와는 거리가 멀었다. 스크린을 통해 뜻하지 않은 간접 교육(?)을 받으며 국내 동호인들은 왜곡된 당구문화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었다.


당구는 그 나라의 역사, 그리고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일본, 중국, 한국 등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당구는 왕실에서 출발했다. 특히 역사와 문화가 깊은 유럽은 당구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상상을 초월한다. 당구 플레이어는 국민 우상이 되기도 한다. 영국의 경우 왕실의 지원 아래 BBC방송 주관으로 연간 40만 파운드(한화 약 6억 원)상당의 크고 작은 스누커 당구대회가 연 11차례나 열리고, 당구 선수는 테니스 선수 다음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1997년 기준). 네덜란드, 덴마크 등에서는 고액의 상금이 걸린 클럽 별 3쿠션 대회가 연간 40여 차례 이상 열려 공식적인 월드대회 참가보다 클럽에서 개최하는 대회만 찾아다니는 세계적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당구 이미지 개선 위한 당구인들 몸부림


1985년 한국 당구는 인위적인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당시 한국당구의 중심축은 한국당구경기연맹이었는데 대한당구회가 조직되면서 흐름이 바뀐다. 구심점 없이 움직이던 경기인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일당구대회가 재개되고 방송대회도 추진되었다. 만점대회와 함께 프로당구대회도 문화체육관에서 시작해 강남 뉴코아백화점과 여의도백화점, 그리고 대전 강남 르네쌍스 호텔 등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대한당구회는 1991년 대한당구경기인협회로 재편되면서 한국당구의 창구가 된다. 임의조직체였던 대한당구경기인협회 김영재 집행부는 한국당구의 글로벌화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91서울월드컵을 유치한다. 우리 선수들에게 세계 당구를 경험하게 하고 당구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큰 결단을 했던 것이다.


대한당구연맹 제2대 김영재 회장, 대한당구연맹 초대 임영렬 회장, 대한당구선수협회 김문장 씨.(왼쪽부터)


또한 그 이듬해에는 한국당구의 절대적 기획자였던 김문장 씨가 SBS서울방송과 함께 지상파 방송 대회를 기획해 한국당구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27차례 진행된 ‘한국당구최강전’ 방송 대회는 엄청난 파장과 함께 시청률 30%대를 웃도는 국민적 관심을 받았다. 또한 전국투어대회를 개최해 당구 붐 조성에 나섰고 온양그랑프리 전국당구대회, 대전그랑프리 전국당구대회, 한국당구3쿠션 대제전 등 많은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지금과 달리 체육단체의 지원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각종 사업들을 펼치며 당구이미지 개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대한체육회 정식종목으로 가맹, 체육종목으로 인식 바뀌기 시작


1990년대 말까지 다양하지 못한 놀이문화 탓에 젊은 층들은 주로 당구장으로 몰려들었다. 당구장 간판만 걸어도 저절로 장사가 되던 시절이었다. 전국의 당구장들이 호황을 누리며 약 2만8천 여 업소가 문체부에 등록이 되었고 무허가 업소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3만5천 여 개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당구는 임영렬(전 생활체육당구연합회 회장)씨가 꾸준한 로비를 펼쳐 1998년 대한체육회 정식 종목이 되면서 스포츠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어서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도 채택돼 1998년 방콕대회에서 김정규 선수가 동메달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황득희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한국당구의 위상을 높이는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또한 생활체육전국당구연합회가 지역 및 전국대회를 정례화하면서 당구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크게 바뀌게 된다.


이러한 사업들은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게 글쓴이의 생각이다. 공적 쌓기에 연연하지 말고 좀 더 큰 틀에서 보아야 한다. 누가 주최하더라도 큰 문제만 없다면 승인하고 지원해야 한다.

당구를 대중에게 더 많이 알리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미디어에 노출이 되어야 하고, 또 동호인들은 건전하고 건강한 당구문화를 만들기 위한 분위기 조성과 함께 '파수꾼'의 역할에도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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