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왕의 항복을 받아낸다. 우리도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36년을 끝내고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다.


▶1945년 광복, 국외에서 활동하던 당구인들 귀국 러시


광복이 되면서 해외에서 활동하던 각계각층 인사들이 귀국 러시를 이룬다. 만주 봉천(현 선양)과 일본 등에서 활동하던 당구인들도 이 무렵 귀국한다. 이들은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국내파 당구인들과 함께 한국 당구의 1세대가 된다. 이후 한국 당구는 이들이 중심이 돼 각종 대회가 개최되었다. 주로 당구장 주인들의 주최로 대회가 열렸는데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내로라하는 당구인들과 해외파 당구인들이 참가하게 된다.


당구장 주인들이 대회 주최, 상품은 금반지가 주류


1945년 당시 사회적인 혼란으로 기존의 모든 자영업들은 매출에 심한 타격을 입었다. 양복점과 식당, 그리고 놀이문화를 즐기는 공간들이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구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에서 영업 중이던 약 40여 개의 당구장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광복 직후 혼란에서 벗어나면서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당구장도 다시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주로 당구장 주인들이 홍보를 위해 주최하는 친선당구대회가 잇달아 열렸는데, 1946년 ‘어성 당구장’을 시작으로 ‘태양 당구장’과 ‘대한 당구장’ 등에서 매년 수차례의 대회가 열렸다. 상품은 대부분 금반지였고 일정 금액의 현금이 주어지기도 했다.


6.25전쟁 혼란 틈타 무위도식 깡패들이 당구장 점령


당구대회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직격탄을 맞는다. 당구대는 1930년 경 일본에서 부산을 통해 들어왔는데 1950년대 초반 부산에도 적지 않은 당구장들이 운영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대구와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 사람들이 부산에서 당구를 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당구는 주로 일본 유학생 및 사회적으로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일반 대중들이 당구장에 드나들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6.25전쟁의 혼란을 틈타 무위도식하던 깡패들이 당구장을 점령하면서 당구장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지식인 및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당구장을 멀리 하면서 당구의 본질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잘못된 국내 당구문화의 출발점이 바로 부산과 6.25전쟁이었던 것이다.


휴전이 되면서 사회지도층 인사 중심으로 당구협회 조직


1953년 휴전이 되면서 부산으로 내려갔던 당구인들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데, 경기 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한 이들이 중심이 되어 임의조직인 대한당구협회가 만들어진다. 회장에 이재학 씨(제 3대 국회 부의장)가 선출되면서 명실상부한 당구조직체가 구성된 것이다. 대한당구협회는 첫 사업으로 창립기념 제1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에서 박윤조 씨가 우승을, 최기창 씨가 준우승을 차지한다. 대회가 활성화 되면서 이 시기에 웅천에서 석판이 생산되고 국산 당구대와 당구공, 당구지, 쿠션 등이 만들어지면서 당구장이 활성화되는 바탕이 마련된다.


1962년대 사행성 종목이란 이유로 포켓당구대 철거명령


이 시기에 서울에 1000여 개의 당구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새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57년 대한당구협회 주최 제 2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가 신문회관에서 개최되었으며 최석영 씨가 우승을 한다. 같은 해 5월 부산당구협회가 주최한 전국대회에서 3쿠션은 조동성 씨가, 4구에서는 박기환 씨가 우승을 차지한다. 서울에서 초청된 박수복 최석영 조동성 씨의 시범경기도 펼쳐졌다. 이 무렵 적구 2개를 맞히면 1점으로 정하는 사규 경기 규정이 정해진다. 오늘날 4구 경기의 시발이 된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며 ‘사회 정화’를 내세워 깡패들을 ‘재건대’란 이름으로 제주도로 보내는데 이들을 잡아들이는 곳으로 당구장을 선택되면서 당구장은 된서리를 맞게 된다. 사행성이 있다는 이유로 '철거 명령'이 떨어져 포켓당구대가 당구장에서 사라졌다. 당구장은 군사정부의 관리 감독을 받게 되는데, 보사부 산하 환경위생 분과위원회 편제에 들어가 이부산 위원장이 당구를 총괄하게 된다.


한국당구 초기 주축인 38인이 한국당구 주도적 역할


제 2대 대한당구협회의 관리운영은 보사부 환경 위생분과 내 당구분과 위원회가 했다. 당구분과 위원회는 당구대회를 주력사업으로 설정, 당구분과 위원회 주최 전국당구대회를 서울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개최한다. 이 대회에서 김경호 씨가 우승하고, 1963년 11월 신문회관에서 열린 제2회 전국당구대회에서는 이병호 씨가 우승하는 등 당구장에서 즐기던 당구가 대회란 타이틀로 새 출발하는 시기였다. ‘당구인’이란 수식어가 붙기 시작한 된 것도 이 즈음이다. 박수복 권수동 박윤조 김창섭 노기호 조성철 최기창 지윤옥 이한종 강두석 김한기 김영재 김주린 김상호 등이 당시 한국 당구의 중심인물들이었다.


한국당구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김영재, 강두석, 김한기, 조성철, 조행선 원로 (왼쪽부터).


한국당구의 맥를 이어 오고 있는 선수들


1970년대 초 당구장은 물론 특설경기장에서도 대회가 열리면서 당구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당구인들이 하나 둘씩 대회에 참여하며 신예 선수들의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주로 지역에서만 활동하던 ‘당구꼬마(지역에서 당구를 가장 잘 치던 사람들)’들이 중원으로 몰려들며 바야흐로 당구의 ‘춘추전국시대’를 맞게 된다. 서울 부산 대전 대구 광주 인천 출신 선수들이 주류를 이뤘는데 양귀문 김문장 박병문 김용석 전광웅 양의모 신항균 김석구 최언보 등이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중반 한국당구의 중심인물들이었다. 다음세대로 김동수 정정우 정상철 김상윤 한익범 안지수 김철민 신재철 김평준 박대용 고창한 장성출 유재영 남도열 백정기 이상천 조성구 조창섭 조재형 김석윤 김종석 김무순 김정규 선수 등이 한국당구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