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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류재규 기획위원]포항 황선홍 감독(47)이 지난달 29일 서울과 K리그 최종전을 끝으로 친정팀과 아름답게 작별했다.

찬란했던 선수 연기 1막에 이어 2003년 전남 코치로 분한 지도자 연기 2막도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황새’가 주연하고 숱한 조연이 함께 한 론그라운드의 인생극장 1,2막을 10장의 사진을 통해 돌아본다.

88년 12월6일 아시안컵 A조 일본전 결승골로 A매치 103경기 50골 대장정의 막을 열었다.

90월드컵 지역예선. 8경기에서 7골을 몰아쳤지만 잦은 부상으로 월드컵 본선무대마다 ‘비운의 황새’가 됐다.

새내기 신고식 격인 ‘계곡차기 신공’ 수련의 관문을 그도 피해갈 수 없었다.

94 미국월드컵은 특히 힘들었다.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는 혹사와 누적된 부상 때문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만 비난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단군 이래 저만큼 욕 많이 먹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파서 축구 좀 못한 게 그렇게 큰 죄입니까.”

명예회복 꿈에 부풀었던 98 프랑스월드컵.

출정식을 겸해 국내에서 열린 중국과 친선경기에서 상대 골키퍼의 거친 태클에 또 쓰러졌다.

차범근 감독에게 “대포주사(진통제)라도 맞고 뛰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조별리그 3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보다가 귀국했다.

그의 유년은 순탄하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에 시달렸다.

몸에 고무줄을 달고 뛰면 아버지가 차로 뒤따르며 택시 미터기로 거리와 속도를 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독일 부퍼탈 시절 만난 부인 정지원씨는 이런 그를 따뜻하게 감싸준 사람이다.

그녀가 함께 있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일본 J리그 가시와로 가 외국인 첫 득점왕에 오르는 등 4년을 준비한 끝에 다시 맞은 2002 월드컵.

폴란드와 조별리그 1차전에서 그가 골을 터뜨렸다.

유상철의 추가골로 결과는 꿈같은 2-0 승리.

대한민국의 월드컵 본선 첫 승리였다.

미국과 2차전 전반 22분. 상대 수비수와 공중볼을 다투다 눈두덩이가 찢어졌다.

붕대를 감고뛰다 안정환과 교체됐다. 1-1 무승부. 포르투갈과 3차전 승리로 첫 16강 고지를 밟았다.

터키와 3~4위전 뒤 히딩크 감독이 그의 손을 번쩍 든 것은 베테랑의 헌신과 열정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2002년 11월 20일 브라질과 친선경기.

15년 영욕을 뒤로 하고 태극 유니폼을 벗었다.

후배들의 무동을 타고 절친이자 라이벌 홍명보와 긴 세월을 함께 해준 팬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2003년 전남 2군 코치로 새 도전을 시작했다.

2007년 부산 감독을 맡아 첫 지휘봉을 쥐었다.

스승 허정무 인천 감독과 그라운드에서 재회했다.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모든 걸 다 갖춘 채 달리는 건 재미가 없잖아요. 어려운 곳에서 시작해 멀리 보려고요”라고 했다.

그러나 ‘낮은 곳’에서의 출발은 시행착오와 시련의 길이었다.

2011년 청춘의 꿈이 서린 스틸야드에 다시 섰다.

2012년 FA컵에서 지도자로 첫 우승을 맛봤다.

2013년 K리그, FA컵 정상에 오르는 ‘더블’을 이뤘다.

외국선수 없이 유스팀 출신 선수로만 기적을 이룬 그에게 팬은 ‘황선대원군’이라는 호칭을 안겼다.

2015년 11월 29일.

‘황새’는 다시 친정팀과 팬에 작별을 고했다.

태풍을 타고 더 높이 날 굳센 날개를 위해, 더 멀리 볼 천리안을 위해.

곤(鯤)이여, 환골과 탈태의 아픔을 두려워 말라!

대붕(大鵬 )이 될 조짐이려니…

So Long 대원군! Good Luck 황새!

jklyu@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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