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F-WILLIAMS
그라프(위)와 윌리엄스. 출처 | 그라프 홈페이지, 윌리엄스 페이스북

[스포츠서울] 올시즌 세 번째 메이저 대회인 윔블던이 29일 개막한다. 최대 관심사는 여자 테니스 세계 최강자인 세리나 윌리엄스(34·미국)가 그랜드슬램 대회 4연속 우승을 달성하느냐다. 윌리엄스는 지난해 US오픈을 시작으로 올해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까지 3개 대회에서 잇따라 정상에 올랐다. 윔블던마저 우승하면 12년 만에 두 번째 ‘세리나 슬램’을 기록하게 된다. 그는 지난 2002년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에 이어 2003년 호주오픈까지 4개 대회 타이틀을 차지했다. 테니스가 프로화된 ‘오픈 시대(1968년 이후)’에서 4개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을 두번 달성한 선수는 슈테피 그라프(46·독일)뿐이다. 그라프는 1988년 4개 대회를 석권한 뒤 이듬해 호주오픈까지 5개 대회 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그리고 1993년 프랑스오픈부터 1994년 호주오픈까지 또 한번 4연속 메이저 제패에 성공했다.

윌리엄스가 대기록에 다가서면서 여자 테니스 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누구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지게 됐다. 그라프인가, 아니면 윌리엄스인가? 이제까지는 그라프가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데 큰 이견이 없었다. 그라프는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모두 22번 우승했다. 마거릿 코트(24회 우승)에 이어 역대 2위. 그러나 코트는 24개의 타이틀 가운데 13개를 오픈 시대 이전에 따냈다. 오픈 시대 이후로는 남녀를 통틀어 그라프가 최다승이다. 그는 테니스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캘린더 골든 슬램(Calendar Year Golden Slam)’ 달성자다. 1988년 한 해에 4개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과 올림픽 금메달을 독차지했다. 다섯 차례나 한 해에 3개의 그랜드슬램 대회를 우승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377주 세계 1위도 남녀를 통틀어 최장기록이다.

그런데 누구도 근접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그라프의 아성이 윌리엄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윌리엄스는 올해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하면서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개인 통산 20번째 단식 타이틀을 따냈다. 그라프에 2개 차로 다가선 것이다. 프랑스오픈 3회전에서 승리하면서 이 대회 개인통산 50승째를 거둬 4개 그랜드슬램 대회 모두 50승 이상을 기록한 첫 번째 여자선수가 되기도 했다. 그라프를 비롯해 크리스 에버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등 여자 테니스를 대표하는 레전드들도 4개 대회 가운데 3개 대회에서만 50승 이상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그라프의 위업은 이미 완성된 것이지만 윌리엄스의 기록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라프는 30세의 나이로 프랑스오픈에서 마지막 타이틀을 추가한 뒤 은퇴했지만, 윌리엄스는 여전히 최강자의 자리를 지키며 새로운 기념비들을 세워가고 있다.

1988년 호주오픈부터 1990년 호주오픈까지 9개의 메이저 타이틀 가운데 8개를 휩쓸었던 그라프는 이후 1993년 호주오픈까지 12번의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2개의 타이틀을 추가하는데 그친다. 이 기간이 그의 눈부신 커리어에서 눈에 띄는 침체기이면서 그가 쌓아올린 업적에 흠집을 남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때 모니카 셀레스가 등장한 것이다. 셀레스는 1991년과 1992년 열린 8개의 그랜드슬램대회 가운데 6개의 우승을 휩쓸었고, 1993년 호주오픈에서도 그라프를 꺾고 정상에 올랐다. 19세의 나이에 8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하며 새로운 최강자로 떠올랐다. 그런 셀레스가 199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경기하던 중 그라프의 팬을 자처한 남자로부터 칼에 찔리는 사고가 벌어졌다. 몸에 난 상처는 심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큰 충격에 빠진 셀레스는 2년 동안 코트에 나서지 못했고 이후에도 다시는 예전의 실력을 되찾지 못했다. 셀레스는 짧은 전성기였던 1990년부터 1993년 사이에 메이저 대회 결승에서 그라프와 4번 만나 3번을 이겼다. 불행한 사고만 아니었다면 테니스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윌리엄스가 이미 그라프를 넘어섰을 수도 있다. 셀레스가 테니스를 중단한 사이에 그라프는 개인 통산 두 번째 4개 메이저 연속 제패에 성공했다. 셀레스가 사고를 당한 것은 그라프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 덕을 본 것만큼은 틀림없다.

윌리엄스는 두 번째 ‘세리나 슬램’을 넘어 그라프 이후 27년 만에 한 해에 4개 메이저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다른 3개 대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적이 좋지 못했던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했기 때문이다. US오픈에서는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정상에 오를 정도로 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윔블던이 캘린더 그랜드슬램의 고비다. 올해 그의 페이스는 출전한 3개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던 지난 2002년 이후 최고조에 올라있다. 올해 그의 패배는 부상에 따른 기권을 제외하면 지난달 마드리드오픈에서 크비토바에게 진 것이 유일하다. 투어와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29승 1패. 적수가 없다.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한 당분간 그를 꺾을 선수는 없어 보인다.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면 자연스럽게 통산 우승 횟수에서도 그라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윔블던을 앞두고 두 명의 남녀 레전드가 윌리엄스가 이미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존 매켄로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세리나가 그 누구보다 뛰어난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가장 위대한 선수다. 그렇게 강한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정신적으로 더욱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18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한 에버트도 “세리나는 이미 여자 테니스의 차원을 넘어섰다. 다른 선수들보다 두 세 단계는 높은 수준의 경기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가장 위대한 선수다”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우승 횟수에서 그라프에게 뒤져있지만 위대한 선수를 평가하는 기준은 숫자가 아니라 플레이의 경지라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최근 윔블던에서 성적이 좋지 못했던 까닭에 캘린더 그랜드슬램은 물론 우승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윔블던에서 다섯 차례 우승했지만 2013년에는 16강, 지난해에는 3회전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매켄로와 에버트의 말처럼 서로 자신의 최상의 플레이를 펼쳤을 때 윌리엄스를 이길 수 있는 선수는 없다. 윌리엄스는 코트에서 다른 선수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테니스를 조금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스스로와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체육부 선임기자 bukr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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