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인터뷰] 빙상계 이규혁이 있다면, 검도엔 이강호가 있다
    • 입력2015-06-03 06:10
    • 수정2015-06-03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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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1

남자 검도대표팀 ‘맏형’ 이강호(구미시청). 사진은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제16회 세계검도선수권 남자 단체전을 앞둔 이강호가 근처에서 구슬땀을 흘린 뒤 휴식을 취하고 있다. 도쿄(일본) | 김용일기자 kyi0486@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장면1. 45년 만에 ‘무도의 성지’인 일본 도쿄 부도칸(武道館)에서 열린 제16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살아있는 전설’ 이강호(37·구미시청·6단)는 출국 전 취재진과 검도인 앞에서 “혼을 다해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를 잡아보겠다”고 말했다.

장면2. 지난달 31일 대회 마지막 날 남자 단체전 결승전을 10여 분 앞뒀을 때다. 이강호는 선봉부터 부장으로 나서는 장만억(26·구미시청·4단) 조진용(25·남양주시청·4단) 박병훈(30·용인시청·5단) 유제민(24·구미시청·4단) 등 후배를 불러들여 “이 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준비했다는 마음으로 다 쏟고오자”고 말했다.

장면3. “얘들아 미안하다.” 만 37세 백전노장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준결승 미국전에서도 1-0의 아슬아슬한 승부에서 시원한 허리, 손목치기 승리로 결승행을 이끈 이강호. 결승에서도 1-2로 뒤진 가운데 주장으로 나섰지만, 편파 판정을 등에 업고 지키기에 나선 일본의 우치무라 료이치와 무승부. 끝내 준우승을 차지한 뒤 후배들이 눈물을 쏟자 맏형은 자기 탓이라고 외쳤다.

눈물 흘리는 대표팀
일본과 단체전 결승에서 심판의 편파 판정 끝에 안타깝게 준우승한 뒤 눈물을 흘리는 남자 대표팀. 이강호는 동생들에게 다가가 위로한 뒤 “미안하다”고 말했다.

남자대표팀 준우승
남자 단체전 준우승을 차지한 뒤 기념촬영하는 모습. 이강호는 오른쪽에서 세 번째.


이강호는 ‘일본 천하’로 불리는 검도계에 잦은 균열을 일으킨 한국산 대들보다. 16차례 세계선수권 부문별 경기에서 일본을 제외하고 다른 나라가 우승을 맛본 건 지난 2006년 대만 13회 대회 남자 단체전이 유일하다. 당시 이강호가 뛴 한국은 칼의 노래를 부르며 정상에 섰다. 또 2년 전 러시아에서 열린 ‘무도 올림픽’ 월드컴뱃게임에서도 일본 강자들을 넘어서며 한국 검도 60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대회 개인전 우승을 달성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5회 연속으로 세계선수권 무대를 밟은 이강호. 개인보다 한국 검도 자존심을 걸고 투혼을 다짐한 이유다. 그러나 국제 검도계에 영향력을 지닌 일본세, 그것도 적지에서 칼을 꽂는 건 쉽지 않았다. 대회 국제심판 36명 중 30%가 넘는 12명이 일본인으로 구성됐다. 나머지 국적 심판도 일본계가 많다. 주요 고비에서 나오는 편파판정의 벽은 또다시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후배 앞에서 “내 책임”이라고 말한 건 이 같은 환경에 굴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라는 메시지처럼 들렸다.
일본과 결승에서 1-2로 뒤진 가운데 이강호의 칼에 운명이 걸려 있었다. 상대 우치무라 료이치는 지키기만 하면 우승이 가능한 상황에서 지독하게 수세적으로 나섰다. 직접 때리기보다 칼을 못 쓰도록 근접전을 벌였다. 반면 이강호는 쉴 새 없이 우치무라를 두드렸다. 앞서 4명의 후배가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을 당한 것에 울분이 느껴질 정도다. 끝내 소득 없이 무승부, 뒤집기에 실패한 것에 통탄해했다. “정말 죄송하다. 내가 더 잘했어야 하는데, 후배들에겐 미안하고 고맙다.”

◇“검도계 이규혁? 사실 나도 검색해봤다”
이강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빙상계 이규혁(37)이 떠오른다. 대표팀 플레잉 코치처럼 남녀 선수 모두에게 매 순간 멘토 구실을 하며 현장을 지켰다. 정신적 지주의 본보기다. 후배에게 존중받는 선배, 최고 권위 대회의 5연속 출전은 이규혁과 비슷한 행보. 더구나 둘은 1978년생 동갑내기다. 특히 경기장 내외에서 솔선수범하고, 성실한 태도는 후배로부터 “가장 무서운 선배”라는 말을 듣는 원동력이다. 지금부터는 세계선수권 개막을 앞두고 도쿄 현지에서 이강호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이규혁 닮은꼴’ 질문에 “솔직히 이규혁 선수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 적이 있다. 나이도 같고, 세계 대회 출전 횟수도 비슷하더라”며 “(소치)올림픽 때 상당히 감명받았다. 후배에게 존중받으며 투혼을 발휘하는 그를 보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규혁 선수가 비록 올림픽 메달과 인연은 없으나 빙상계에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나 역시 화려한 선수가 아니다. 그저 그런 선수였다. 그러나 매 순간 성실했고, 후배에게 ‘저 선배 참 열심히 한다’고 느끼게 할 만큼 주어진 시간에 온 힘을 다했다”고 했다.

이강호
남자 검도 대표팀 주장 이강호(오른쪽). 사진은 이강호가 지난 28일 일본 도쿄에서 남녀 선수단을 이끌고 제16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부도칸 답사 길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는 모습.


◇자나 깨나 검도 생각…‘칼’은 운명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 씨름 등 남다른 운동 능력을 자랑한 이강호.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승평중학교 시절 남다른 운동 능력을 지닌 그를 눈여겨본 체육교사가 검도부 창단에 맞춰 ‘호출’했다고 한다. “검도의 ‘검’자도 모르고 들어갔다. 시골이어서 사설 도장도 없었다. 인근 광주에 가서 검도를 배웠는데, 적성과 잘 맞았다. 처음엔 부모님께 검도부 들어간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나중에 말씀드리니까 ‘남자로 태어나서 도둑질을 하려면 최고의 도둑이 되라고 하듯 운동할 거면 제대로 해보라’고 하시더라.(웃음)” 이강호가 속한 승평중은 소년체전 준우승까지 달성하는 등 가파르게 성장했다. 순천공고, 목포대를 거치면서 이강호의 검도는 힘과 스피드는 물론, 기술적으로도 뚜렷하게 올라선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시련을 안긴 건 공교롭게도 1999년 최연소 국가대표 발탁 이후다. 2000년 미국 샌타클래라 세계선수권(11회)을 3개월 앞두고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당시 내 장점은 스피드와 체력이다. 칼이 빠르고 힘이 좋아도 통하지 않는다고 평가받으니 한계가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차례 국가대표 탈락 “더 강해진 원동력”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한 뒤 맛본 대표팀 탈락의 아픔. 더는 자신의 칼이 진화할 수 없다는 회의감에 검도를 그만두기로 했단다. “처음엔 속이 후련했다. 훈련 안해도 되고, 친구들과 놀고 술도 마셔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간 편했는데, 그 이후 허망하더라. 이 정도밖에 안되나 창피했다. 다시 죽도를 잡았다.” 무도는 기술보다 조화라는 말이 있다. 신체 뿐 아니라 정신을 조화롭게 수련해야 실전에서 원하는 것을 이행할 수 있다. 쓰라린 아픔 이후 검도의 깊이를 이해했단다. 마침내 2003년 브라질 세계선수권(12회) 국가대표로 뽑혔다. 첫 상대였던 일본의 강자 데레모토 쇼지에게 한 판으로 졌다. “무슨 생각으로 경기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쉬웠지만 아련한 추억이다.” 첫 대회 실패를 자양분 삼은 이강호의 도전은 2006년 결실을 맺었다.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 미국을 누르고 우승. 이전까지 세계선수권 개인전, 단체전에서 일본의 우승 독식이 깨진 순간이다.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이뤄낸 성과지만, 운도 따랐다. 일본 주력 선수들이 전날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뛰지 못했고, 미국이 일본을 이길 줄 누가 알았겠느냐.”

◇“2018 인천 대회? 무리하게 욕심내지 않는다”
이강호는 5연속 세계선수권 무대를 밟으면서 단체전 우승은 물론, 세 차례 준우승(2003 2012 2015)을 달성했다. 개인전에서도 3위(2009)를 차지했다. 2년 전 컴뱃대회에서 개인전 우승을 차지한 건 지긋한 일본세에도 끊임없이 도전의 가치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덧 경기는 물론, 검도 전체를 바라보고 읽을 줄 아는 노련미가 생겼다. 3년 뒤 열리는 인천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은 30년 만에 한국이 주최하는 대회다. 부도칸에서 여자 개인전을 관전하던 중 그는 관중석을 둘러보며 “인천에서도 이 정도 관중이 오겠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이번에 일을 내서 검도에 국민적인 관심을 끌도록 하고 싶다”고 웃었다. 원하던 우승 고지를 밟진 못했으나 남녀 검도 대표의 투혼과 종주국을 뒤흔든 기량은 장밋빛 미래를 들여다보기에 충분했다. 이강호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지속해서 창조하는 삶을 꿈꾼단다. “선수 생활 언제까지 하겠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다. 길게 2~3년을 바라본다. 2018년 인천 대회? 욕심부리지 않는다. 박수 칠 때 떠나고 싶다. 물론 그때도 기량이 된다면 도전하겠다.”

도쿄(일본) | 김용일기자 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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