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현의 창과 창 컷

[스포츠서울 | 고진현전문기자] 우리는 보았다. 400g 남짓한 둥근 공 하나에 전 세계가 들썩이는 모습을…. 우리는 느꼈다. 간절한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역사의 진면목을…. 우리는 알았다. 열과 성을 다해 최선을 다하면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았다. 감동이란 마음으로 쓰는 투혼에 대한 숭고한 울림이라는 것을….

감동의 대서사시. 국가와 국민을 한데로 묶어내는 스포츠를 설명할 때 흔히 인용되는 문구다. 2022카타르월드컵도 그랬다. 6일 새벽(한국시간) 브라질과 16강전에 패해 한국의 월드컵 여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한민국 모두가 축구공 하나에 열광하고 몰입했다. 계급과 이념 그리고 날선 정치로 갈가리 찢긴 한국사회가 모처럼 하나가 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국민들도 지겨운 정치와 모난 이념의 대결에서 모처럼 해방된 듯 축구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태극전사들이 전해준 감동과 기적의 스토리에 갈등과 반목이 고스란히 묻혔다. 월드컵 축구가 안겨준 꿈과 희망 그리고 일체감이 반갑다. 그동안 정치는 실망과 좌절감 그리고 진영의 논리만 강요하지 않았던가. 이번 월드컵을 통해 축구가 정치보다 더 많은 위안을 국민에게 준다는 사실에 모두가 공감했다.

지금 한국 사회에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증오와 혐오를 조장하는 투쟁 구호보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치는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이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위정자들은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 함성에는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살가움이 스며있다. 그리고 서로를 보듬는 따뜻함도 배여있다. 사회를 갈라놓는 게 아니라 하나로 뭉치에 하는 일체감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동력이 아닐까 싶다.

중층적 모순구조에 찌들대로 찌든 대한민국이 축구공 하나에 똘똘 뭉쳤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체육의 가치를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줄 만하다. 한국 사회에서 체육은 아직도 주변부의 가치에 머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체육은 타자와의 대결,그것도 경쟁의 가치에 국한돼 있다. 그보다 더 큰 가치의 실체가 월드컵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바로 사회 통합의 가치다.이념과 정치적 스펙트럼이 달라 극단의 대립과 증오에 사로잡힌 사람들마저도 하나로 만들어내는 힘은 놀랍기 그지없다. 거대한 용광로 안에서 온갖 갈등과 반목을 모조리 녹여낼 수 있는 게 체육의 가장 위대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선수들도 이번 월드컵에서 “자부심”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 그렇다. 자부심이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심리적 호감에 다름 아니다. 자부심은 물리적 에너지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곤 한다. 그래서 체육의 힘은 무섭다.

좁은 국토와 적은 인구의 한국이 체육 강국으로 자리잡은 데는 재능과 정책의 절묘한 합주에서 찾을 수 있다. 뛰어난 재능의 선수를 발굴·육성하는 정책적 시스템이 한국 체육의 본령이자 기적의 퍼포먼스의 밑바탕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체육은 상당히 후퇴했다. 과잉신념에 따른 잘못된 정책으로 체육의 국제 경쟁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엘리트체육을 약화시키는 정책적 방향이 계속된다면 월드컵의 국민적 환호는 과연 가능할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지난 정권에서 그릇된 체육정책을 강제한 정치인들의 목소리는 왜 이리 조용한지 엄중히 따져 묻고 싶다. 거꾸로 간 ‘체육의 시계’를 되돌리는 건 재론할 필요가 없다. 체육의 국제경쟁력 확보는 이미 사회적 합의를 통해 형성된 어젠다이기 때문이다. 정치공학적 셈법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이 체육지형을 바꾸고자 시도한 일련의 체육 힘빼기 정책은 이제 국민이 용납하지 않는다. 대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배트맨 마스크 안에 꽁꽁 숨긴 채 그라운드를 누빈 손흥민의 헌신을 통해 우리는 많은 걸 깨달았다. 체육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지,그리고 그 위대한 가치를 정치논리로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사실까지….

이번 월드컵은 “후회와 아쉬움이 남지 않는 대회”로 요약할 수 있겠다. 후회와 아쉬움이 남지 않다니? 그건 모든 걸 쏟아부었다는 의미다. 진심을 다한 승부에 남는 건 앞으로 가야할 목표에 대한 명확한 인식 뿐이다. 패배를 통해 우리의 위치를 객관화할 수 있었고,톱 레벨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할지를 비로소 알게 됐다. 세계 축구의 메인 스트림에 올라탔고,한국 특유의 조직력과 색깔도 갖춘 상황에서 남은 숙제는 개인전술이다. 한국 축구의 개인기는 볼을 지킬 수 있는 수준까지는 도달했지만 아직 미흡하다. 이제 1대 1 상황에서 상대를 제칠 수 있는 기술을 장착하는 게 남았다. 그게 바로 한국 축구에 주어진 마지막 숙제다. 축구라는 작은 창을 통해 한국이 보였다. 그리고 나아길 길도 보였다. 사방이 캄캄한 위기의 한국에서 축구공 하나에 모두가 웃고 울었다. 진영으로 찢긴 나라가 월드컵 기간에 하나로 된 게 진짜 행복했다. 체육의 힘과 가치는 그래서 경이롭다.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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